쿠로츠키 :: reminiscence - 어렴풋한 기억. 추억.









성직자X피아니스트 AU






곱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유려히 피아노 건반을 두들긴다. 추색에 젖어들어 점점 짙어져가는 음색 너머로, 문득 기억 저편에 가라앉은 앙금이 뭉근히 피어오르는 듯하였다. 무언가 떠오를듯 말듯, 아무리 신경을 집중시켜도 그 미로와 같은 혼란을 제대로 더듬어갈 수 없었다. 그의 기도는 비천한 색이였어. 어디선가 날아든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멈췄다.

비천한 색?

비천한 색이란건 어떤거지. 제가 기억하는 그는 하얀 성직자였다. 때묻지 않은 순결하고도 고고한 빛을 지닌, 요즘 사람들 사이에선 쉬이 볼 수 없는 순수한 신앙심만으로 이루어진 사람. 내가 보아온 그는 어딘가 유리되어 있었나. 그것은 거대한 익명성에서 숨을 헉 삼키게 하는 심연으로의 놀랄만한 도약이였다. 사고의 방향이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메마른 빛 속에서 끊임없이 그 색을 잃어갔다.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창문 너머, 갈기갈기 찢겨나간 하늘의 한 토막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본래의 기억을 잃어버린듯한 칙칙한 파란색이였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는 그의 색이 얼룩져내리는 것과 같이, 쉼없이 덧칠되어 본질을 잃어갔다.



츠키시마 케이는 쿠로오 테츠로를 좋아했다.
그리고 쿠로오 테츠로는 성직자였다.

동성애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 몸을 담고 있는 그에게 배덕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을 들킨다면 그에게 죄악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츠키시마는 턱 끝까지 찬 진심을 급히 삼켜버렸다. 그것이 기어이 제 목을 옥죄게 될 지언정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쌍방향적인 것이었더라도 결국엔 이루어지지 못할 연정이었다.

상냥을 가장한 겉가죽에 흠뻑 잠겨버린 제게 쿠로오의 마음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제가 가진 진심을 숨기기에 급해서, 눈에 담기에도 버거운 사내를 그저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더랬다. 서린 시선 안에 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쿠로오가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이야기였다.

진탕 녹은 말이 채 갈무리되지 못하고 목 언저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부옇게 번져 오르던 햇살 위로 만물이 푸르게 생동감을 드러낼 즈음에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둑한 교회의 끝에 유난히도 빛을 발하던 당신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었다고.

피아노를 치던 손이 빨라졌다. 조금씩 힘을 싣기 시작한 움직임은, 종내에 다달아서는 두들기듯 거세게 건반을 쳐내렸다. 유려히 움직이던 선율이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 치달았다. 땀방울이 선명히 뺨을 타고 맺혀 흘렀다. 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이 울컥 올랐다.

이 내 마음은 죄악에 물든 것이야.

끝맺지 못한 마음이 갈피를 잃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빛바랜 연문이 마른 가슴을 타고 부서져내렸다. 좋아해요. 단 발음이 쓰게 혀 끝을 굴렀다. 어그러진 시간의 굴곡이 흉터로 저며들어 아문 자리마저 시리게 아팠다.

울음에 목구멍이 먹먹히 차들었다. 들끓는 애정처럼 여름 한철 태워내던 음성이 파리하게 꺼졌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빛도 끝내 점멸하면, 츠키시마는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소리도 없이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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