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네코마 온리전(혈구모임) 에서 판매 예정인 쿠로츠키 트윈지 재(災灰滓再)의 샘플 페이지 입니다.






리베 (@sua_doll)





 담배를 태우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퍽 상쾌하지 못한 기상이었다. 츠키시마는 성인 남자 두 사람이 비좁게 들어맞는 침대에서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제멋대로 구겨진 시트는 반절 정도가 밀려서 간신히 침대 끝에 걸쳐져 머물고 있었다.


 “담배, 안에서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그랬던가?”


 느른하게 풀어진 목소리가 실없이 웃었다. 가볍기 짝이 없는 웃음에 츠키시마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미간 위로 긴 획을 그었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그저 연기를 내뱉는 일에 지성을 다했다. 희뿌연 연기가 녹진하게 뭉쳤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공기 중으로 흩어진 것이 제 숨에도 뒤섞일걸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미적지근한 관계가 끝나면 그는 언제나 하얀 필터를 입에 물었다. 하지 말라고 한게 벌써 일 년 째인데, 하여간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더 해봐야 소용 없단걸 알면서도 관계를 맺을 때마다 시비를 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다못해 창문이라도 여세요.”

 “그치만 밖은 추운걸?”


 그건 쿠로오씨 사정이고요. 짜증스럽게 덧붙인 츠키시마가 널브러진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쿠로오 라고 불린 남자는 잠시동안 마른 몸뚱이를 응시하다, 다시금 손가락에 걸친 담배에 입을 갖다 대었다. 또. 울컥 비어져 나오려던 목소리를 꾹 눌렀다. 슬 올라간 입매가 여기서 한 소리를 더 했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기운을 잔뜩 내풍기고 있었다.


 춘삼월의 경치는 제법 따사로왔지만 정작 날씨는 그리 포근하지 않았다. 두 번 샘내다간 꽃이 먼저 얼어 죽겠네. 나지막히 읊조리는 말에 츠키시마는 그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먼저 갈게요.”


 담배 한 개비가 채 다 타기도 전에 츠키시마는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가방을 둘러멨다. 아무렇게나 끼워넣은 셔츠의 깃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쿠로오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음이 한껏 묻어나는 몸짓에는 아무런 애정도, 성의도 느껴지지 않아서 츠키시마도 그저 고개를 까딱하고 말 뿐이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하얀 셔츠가 말려 올라가고, 츠키시마는 익숙하게 안경을 벗었다.


 “불 끌까?”

 “새삼, 됐어요.”


  정사는 여느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유별나지 않은 애무. 감정은 일절 담기지 않은, 그렇지만 부드럽게 몸을 어루만지는 더운 손.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싸구려 선풍기 소리에 뒤섞인 건조한 신음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넣어도 돼?”


 하여간, 단어를 고르는 센스는 예나 지금이나 지지리도 없었다. 새삼요. 이제와 뭘 그런걸 묻느냐고 덧붙이는 대신에 츠키시마는 하이얀 다리를 허리에 감았다. 다부진 몸이 움직이고 한순간 매트리스가 늘찐히 흔들렸다. 아. 목구멍에서부터 엷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머리를 감싸던 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로오는 상체를 들어 어깨를 가볍게 받쳐 안았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지의 잔상이 아른아른 시선을 끌었다. 저를 만날 때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던 반지. 아무래도 좋았다. 츠키시마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 없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입술을 맞부딪혔다. 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되는데로 짓씹어 불어터진 입술 사이로 가늘게 혈선이 늘어졌다. 쿠로오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은 채 입술을 떼었다. 금세 떨어진 온기에 츠키시마는 불만스레 허리를 뒤틀었다.








라젤 (@leesa1134)





 담뱃재의 음울한 향이 방 안을 맴돌았다. 가을과 겨울 사이, 슬슬 건조해졌을 법도 하건만 여전히 눅진거리는 숨결은 무겁게 가라앉아 바닥에 깔린 다다미 위로 진득히 스며들었다. 작은 방을 한가득 메운 냉기 어린 음습함은 뻑뻑 피워대는 담배의 열기에도 도무지 사그라들 기색이 없다.

 불 꺼진 적막 속 구석진 곳의 어둠은 미약한 숨소리마저 게걸스레 베어 물었다. 점점 해가 빨리 지네. 어둑한 정경을 둘러보다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창 밖으로 요란스러운 경적 소리가 몇 차례 울렸다. 뒤이어 굉장한 엔진음이 아득히 멀어진다.


 귀를 파고든 소음을 끝맺는 먹먹한 침묵을 곱씹으며, 쿠로오는 그 작은 공간이 오랫동안 물을 갈지 않은 어항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쿄 한복판을 정처 없이 떠도는 어떤 유리된 공간. 그 속에 든 건 얇은 아가미를 들썩거리며 가냘픈 호흡을 이어나가는 금붕어다. 상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몇 번이고 같은 곳을 돌고, 물이 썩어 연약한 비늘이 마모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안주하려는.


 속옷 한 장만 대충 걸친 채 낮은 침대 위로 걸터앉은 그는 작은 창을 채운 뿌연 먼지로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다. 의식이 하염없이 침잠한다. 잠겨든다. 낡은 시간을 품은 기억이 범람했다. 높게 든 창을 타고 흘러 들어온 햇살 속을 유영하는 먼지와 그 아래에서 빛을 머금던 밝은 머리색, 뭐가 그리 불만인지 미묘하게 찌푸리고 있던 얼굴. 옹기종기 모여든 사내애들 사이에서도 한 뼘은 커 툭 튀어나온 머리꼭지가 유난히 눈에 띄던.


 아니지. 그가 원하는 것은 더 나중의 것이었다. 츠키시마의 웃는 낯을 떠올리는 거다. 자, 시간을 뒤로 돌려 보자. 일 년,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던 그날처럼 찡그리고 있던 얼굴. 이 년, 축축하게 뒤엉키던 숨결과 간절한 몸짓. 삼 년, 익숙한 감각을 좇아 흔들리던 몸뚱어리. 사 년, 저 무미건조한 눈빛. 시선.


 기어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기억까지 들추어 아주 흙탕물을 만들고 나서야 쿠로오는 비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그런데 그게 언제였더라. 일 년 전이었을까? 아니면 이 년은 되었나. 삼 년 전일 수도 있지. 그도 아니면 갓 만났을 무렵일까. 진탕 들쑤셔진 기억은 어떻게 쏘아보든 명료한 답을 일러 주지 않았다.


 그렇게, 이따금씩 어린 날이 남긴 자흔들을 마주해 감구할 때면 차마 막을 새도 없이 연거푸 쏟아져 내리는 것이 있다. 그리움이라 칭하기엔 애절하지 않고 미련이란 단어는 비참하다. 그리하여 이름 하나 붙이지 않은 그것을 속절없이 명치 위, 심장과 폐 사이 어딘가쯤에 한가득 채워 넣고 나면 꼭 속이 답답해져 쿠로오는 습관처럼 담배를 물곤 했다.


 후에 돌이켜 보면 그만큼 부질없는 행위도 없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몸에 밴 굴종은 구차하기 짝이 없어 아무런 알맹이도 담기지 않은 텅 빈 껍질을 물고 늘어질 따름이었다. 자해와 자위의 경계가 흐지부지하게 변색된 경계에서 그는 그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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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츠키








소재멘트 :: 뒷모습


아카아시 케이지 X 츠키시마 케이





  투둑, 투두둑. 등굣길부터 시작된 비는 점점 몸집을 키워서 하굣길에 다다라서는 맞으면 살을 에릴 듯이 쏟아져내렸다. 츠키시마는 빈 손을 내려다보다 우산도 없이 길바닥에 몸을 던졌다. 빗방울이 닿은 곳마다 욱신거림이 퍼지는게 집에 도착할 즈음엔 멍이라도 들 것 같았다. 비에 젖어 뿌얘진 시야에 앞서 걸어가는 하얀 운동화가 들어왔다.


  우산 없는거 알면 좀 씌워주지.


  진흙을 잔뜩 덮어쓴 운동화의 밑창이 퍽 낯익었다. 수십, 수백번을 내려다본 당신의 운동화. 끝이 조금 뻗친 짧은 머리칼부터 선이 고운 허리까지, 당신의 등에 걸린 마른 근육을 말하라면 감히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당신의 뒷모습. 매정하게 돌아선 서늘한 어깻죽지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뒤따라 걷는 제 존재를 알면서도 모른 척 시선 한 점 주지 않는 뒷통수가 얄미웠다. 여지껏 잘만 봐놓고, 당신은 꼭 이럴 때에만 야박하더라. 토해내지 못한 열화가 진득히 목구멍에 늘어붙었다.


  알고 있으면서. 다 보고 있었으면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땅을 두들겨대는 비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나를, 내 뒷모습을, 그렇게 보고 있었잖아. 모를 줄 알았어요? 오늘만이 아니었지. 한껏 도취된 눈으로, 내가 당신을 봐온 시간 동안 당신도 날 봐왔잖아. 어딜가나 검질기게 따라붙던 시선. 비쩍 골은 어깻죽지가 시릴 만큼 지켜봐온 주제에 왜 모른 척을 해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나는 그리 착하지 않아요. 뒤늦게 고개를 돌려도 당신이 나를 내버려둔 시간 만큼 괴롭힐테니까. 나를 빗속에 버려두고 걸어간 이 길을 절대 잊지 않고 계속해서 들쑤실 거에요.


  다 알면서도 모른 척, 그저 못 본 척 넘기면 정말 지나갈 줄 알았을까. 부단히도 피하려 갖은 애를 쓰던 날들, 그러고도 기어이 나를 보던 형형한 눈. 바보. 그래도 내가 좋지. 외면 할 수록 더 깊게 내려앉는 이름 자를 몇 번이고 덧그리고 억눌렀을 당신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다. 말해봐요. 당신이 남긴 상흔으로 가득할 내 뒷모습을 보고 얼마나 이를 물었는지. 당신이 나를 채웠듯, 내 존재도 당신을 채우고 있는지.


  당신의 시선이 머문 자리마다 더운 열꽃이 피었다. 나는 수십, 수백번이고 그 눈빛에 난도당했다. 당신만이 알고 있을 선명한 열상. 잘 찢어진 시선 속 홧홧한 열화가 닿아 생긴 생채기가 번졌다. 얼룩져서 깊다랗게 내려 앉았다. 아아, 이제 조금 아픈데. 퍼붓는 낙수에 몸도 마음도 진탕 젖어서, 어지러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따금씩 나오던 토스 미스. 철처하던 당신의 얼굴이 무너지고 비껴나간 공을 사이에 둔 채 돌아가는 시선의 끝은 늘 제 쪽을 향했다. 알아차린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워서, 부러 눈을 피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돌아가는 시선이 언짢아서 더 당신을 몰아세웠다. 나를 좀 보라고, 집요히 당신을 좇고 또 물고 늘어졌다. 그랬는데. 그럴수록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태도가 오기를 건들였다. 기어이 빗길을 뚫고 당신을 쫓아갈 만큼. 그래, 내가 졌어요. 당신이 이겼어.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봐 줘요.


  악 다문 이 사이로 앓는 소리가 났다. 성긴 마음에 얽어진 시간이 속을 긁었다. 감정이 먹먹히 차들었다. 페부에 물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비를 타고 어지럽게 돌던 열화가 머리 끝까지 번지고, 돌연 시야가 죽었다. 찰박. 물소리가 요란했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바지가 찝찝하게 감겨들었다. 황급히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메는데, 문득 고개를 드니 하이얀 손이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가자, 데려다줄게.”


  회녹빛 눈동자에 가득 담긴 얼굴이 낯설었다. 나른하게 찢어진 눈매가, 잘 빚어진 콧잔등이, 엷은 입술이 생소해서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건네진 손 끝에도 열이 번졌다.


  “…늦었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고.”


  아카아시 케이지. 당신이 나를 끌어올려. 긴긴 시간을 돌아 이제서야 마주본 당신의 얼굴이 웃었다. 지나온 길바닥에 늘어진 물길이 멎었다. 시야를 채우던 당신의 뒷모습이 잘게 허물어져 내리고, 환한 얼굴이 그 위로 덧그려졌다.



7월 10일 하이큐!! 통합 온리전 TSA 에서 판매 되었던 쿠로츠키 초혼(招魂)의 샘플 페이지 입니다.








 해가 하늘의 서편에 걸릴 무렵 쿠로오는 뻑뻑한 눈을 부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모처럼 원없이 잔 주말임에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사람처럼 몸이 축축 늘어졌다. 눅눅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젖은 냄새.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르고 우중충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딸랑-. 말간 풍경 소리가 빗소리에 뒤섞여 귓등성이를 타고 돌았다. 거실 벽면의 큰 창을 열자 선명한 녹색 이파리가 빗줄기에 흐너져내리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흙이며 부옇게 물기 서린 창틀이 눈에 들었다. 습한 공기 덕에 귓가에 크게 울리는 풍경소리를 뒤로 한 채 쿠로오는 달력의 날짜를 짚었다. 8월 17일. 빨간 색연필로 여러차례 죽죽 그린 동그라미가 잔상처럼 시야에 아른거렸다.


 “축제구나-.”


 어제 저녁나절 부터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아 바싹 마른 입술을 가까스로 벌렸다. 새되게 갈라진 목소리의 끝이 조금 뒤집혔다.


 언제부터 켜져 있었던건지 모르겠는 라디오에서는 기상 캐스터가 오늘의 날씨를 말하고 있었다. 비로 인한 교통 체증이 심하다는 말 뒤로 4시 즈음 부터 비가 그칠 거라는 경쾌한 어조가 이어졌다.


 쿠로오는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돌려 놓으며 커다란 컵으로 커피를 마셨다. 상자에서 막 꺼낸 짙은 남색의 유카타는 방충제 냄새가 났다. 반쯤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고 유카타에 몸을 끼워 넣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두시를 조금 넘겨가는 시간임에도 바깥은 마치 귀신이 나올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늘 같은 날에 축제를 오는 사람이 있으려나.”


 말을 그리 하면서도 약속을 취소할 기색은 없었다. 쿠로오는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빈 컵을 가볍게 물로 헹궜다. 거치대에 컵을 놓고 거실 소파에 걸터 앉자 창 밖으로 코를 화단에 묻은 채 킁킁대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빗줄기가 제법 거셌지만 고양이는 개의치 않았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비 오는 날에 고양이가 꽃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축제에 비하면 화단은 무난한가.


 쿠로오는 시답잖은 생각을 머리 한 구석으로 욱여넣으며 널어놓은 오비를 들었다. 잘 마른 천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설프게 모양새를 잡은 유카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오비를 여몄다. 묶인 외견에 서투른 감이 있었으나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문득 조금 후에 쏟아질 잔소리가 귓가를 앵앵대는 듯했다.


 뭔가 더 정리할게 있던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대던 쿠로오의 시야에 텅 빈 어항이 들었다. 물결치는 무늬가 곱다란 둥근 어항은 깨끗하게 정리가 된 채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전에 들어있었을 색색의 자갈이며 물고기 따위가 눈앞을 어른거렸다. 꼬리가 주황색인 금붕어가 들어가면 좋을 지도 모르겠다며 쿠로오는 짧게 생각을 끊었다.


 남은 시간은 삼십 분 넘짓. 지금 나가면 오분 정도 일찍 도착할 듯 싶었다. 쿠로오는 아직 그치지 않은 비를 내다보며 비닐 우산 하나와 지갑을 챙겨들었다. 모처럼의 데이트이니 제가 기다릴지언정 기다리게 할 마음은 없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하늘을 가득히 수놓은 불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조각 부서져내려 새카만 수면 위를 유영했다. 여러차례 연이어 터지는 불꽃이 밤의 군청에 자욱자욱 색을 더했다. 이런걸 두고 절경이라고 하는 거겠지. 언젠가 읽었던 삼류 연애소설의 한 구절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났다.


 커다랗게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쿠로오는 멍멍한 반고리관을 타고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끼익-. 급제동으로 인해 차가 스키드마크를 그리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펑. 터지는 소리. 시야에 가득히 스러져내리는 빛. 차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맺힌 잔상이 선연했다. 땀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쿠로오는 팽팽하게 팽창한 흉부에 찬 숨을 급하게 내뱉었다.


 “무슨 생각해요?”

 “응?”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흡이 가파르게 차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서늘한 감각이 가슴께를 질러들었다.


 “식은 땀도 흘리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차츰 고르게 돌아가는 숨에 의아한 빛을 띄우던 눈이 거둬졌다. 손을 쥐었다 펴니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옆에 앉은 이의 존재에 바짝 굳어 긴장한 몸이 탁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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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좋네요.”

 “그치?”


 나부끼는 바람을 타고 말간 소리가 분분히 퍼졌다. 풍경이 흔들릴 때마다 하얀 도자기의 잔상이 아른아른 시야를 끌었다. 조금 앳된 얼굴의 츠키시마는 부드럽게 풀어진 입매를 끌어올려 웃으며 가만히 풍경을 내다보았다. 


 “츳키, 나중에 우리도 이런 집에서 살까? 이쯤에다가 커다란 창을 내고, 창가에 풍경도 여러개 달아놓고.”


 유백색 벽을 짚으며 히죽 웃어보이는 얼굴에 츠키시마는 큼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같이 살자느니 두 사람이 함께일 미래를 그리는 사내가 좋아서. 새삼 되뇌인 사실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눈에 찬 노란 머리칼 아래로 발간 물이 들은 귀 끝이 퍽 예뻤다.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터진 웃음에 기분 좋은 파동이 몸의 들썩임을 따라 도처로 돌았다.

 하얀 목덜미를 내놓은 머리가 민망함에 흔들렸다. 츠키시마는 고개를 돌린 채 투명한 구 위로 곱다랗게 새겨진 연분홍빛 꽃잎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에……. 자, 잠시만, 츳키, 방금 뭐라고…!”

 “이거랑 이거 하나씩 주세요.”


 한 번만 다시 해줘! 옆에서 칭얼대듯이 돌아오는 말을 덤덤히 무시하며 츠키시마는 풍경 두개를 계산했다. 그리고 하얀 종이봉지에 담긴 것 중 붉은 것을 건네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푸른 꽃잎이 새겨진 제 것과 꼭 같은 모양의 연분홍빛 풍경이 뺨으로 번졌다. 꽃잎보다도 짙게 찍힌 연지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뒷등을 보인 채 걸음을 뭉개던 츠키시마는 다시금 몸을 틀어 잰걸음을 했다. 그리고 무엇을 하려나 고개를 갸울이는 쿠로오의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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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츠키 :: 무제





순자님 달성표 보상글


소재멘트 :: 김경미_다정이 나를





 쿠로오 테츠로는 엷게 피어오르는 연기의 모양새를 내다보다, 다시금 연기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입에 물은 종잇조각 만큼이나 하얀 얼굴이 느른하게 풀어져있었다. 츠키시마 케이가 담배를 피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씁쓸하고 매캐한 담배보다는 분홍색 딸기 사탕이 더 어울릴법한 사내였다. 단 걸 먹으면 체취도 달아지는 건지, 쇼트케이크며 밀크티 따위의 달큰한 체향이 담배연기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굳이 담배를 핀다면 내 쪽이 더 어울리지 않나. 어딘지 모르게 어긋난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처음 츠키시마가 담배를 피는 것을 봤을 땐, 봐서는 안될 것을 봐버린 기분에 마치 죄를 지은 듯도 했다. 빨간 립스틱, 하얀 담배. 그럼에도 쿠로오는 연기를 뱉는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입술이 닿은 부분에 붉게 루즈 자국이 남았다. 쿠로오는 그 모습이 퍽 선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없을 때에는 한참이나 담배를 물고 있으면서, 쿠로오를 발견한 츠키시마는 막 물었던 장초를 툭 떨궈 발로 비벼 껐다. 쿠로오는 그런 몸짓에서 다정을 느꼈다.


 다정이 나를 죽일 것 같아. 이따금씩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툭 내뱉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츠키시마는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입에 물린 필터를 짓씹었다. 얄쌍한 손에 들린 지포 라이터를 몇 번씩이나 깔짝이던 츠키시마는 달칵, 소리를 내며 뚜껑을 닫았다.


 거 봐, 지금도. 피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 주제에 불도 붙이지 못하고 있잖아.


 “시답잖은 소리나 할거면 얼른 가요. 장사 방해돼요.”

 “매출 올려주러 왔잖아, 쿠로오씨는 손님이라고?”


 손님. 제가 말하고도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다. 더운 기운이 머릿속을 마구 헛돌았다. 혹시 지금 표정이 이상하지는 않을까. 마음 깊숙히에 작게 접어 숨겨둔 염원을 들킬까 겁이 난 목소리의 끝이 조금 뒤집혔다.


 츠키시마가 저를 빤히 바라볼 때면, 쿠로오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가죽을 벗겨내고 표피를 저며 들끓는 열화를 꺼내놓을 것만 같았다.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이 가늘게 뜬 눈매가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들어가 있어요. 금방 갈게요.”


 마담한테 얘기해두는 거 잊지 말고요. 덧붙이는 말에 엷은 비성이 섞였다. 츠키시마가 가식으로 엮은 가면을 덮어쓸 때면, 쿠로오는 새삼 느껴지는 거리감에 입술을 물었다.


 돈을 주고 하룻밤 어치의 웃음을 사는 것이 다였다. 제가 아는 것은 가게에서의 츠키시마가 다인데, 조금 더 안다고 해봐야 상냥한 웃음 뒤의 까칠함이 전부일지인데. 그런데도. 예명과 같은 성씨를 제하면 이름도, 사는 곳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츠키시마에게 쿠로오는 뼈가 시릴 만큼 잠겨있었다. 네 존재가 나를 채웠듯, 나도 너를 조금쯤은 채우고 있을까. 문득, 서글픔이 밀려왔다.


 한낱 창기일 뿐이다. 기껏해야 값이 조금 나가는 창기일 뿐이야. 수차례 되뇌인 말을 다시금 머릿속에 새기며, 쿠로오는 주머니 속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 자국이 패였던 네번째 손가락이 매끈하게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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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츠키 :: 회자정리  (0) 2016.02.13
앞 내용의 조각글/2년 전 아카아시 시점









 아카아시 케이지는 멍한 머리로 수업을 따라가려 애썼다. 그렇지만 이미 머리를 가득히 메우고도 비져 나오려는 틈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루를 날렸다는 생각에 얼굴을 쓸며 창 밖을 내다 보는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교시를 알리는 종이 치고도 가는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꾸준히 땅을 적셨다.

 아카아시는 비가 오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꽤나 좋아했지만, 질척해진 땅이나 교복 밑단이 젖어드는 찝찝한 감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이었다. 가방의 맨 밑바닥에 접이식 우산을 들고 다녔으나 굳이 우산을 써야할 만큼 많은 양도 아니었고, 애써 정리해둔 것을 헤집어 놓기가 싫어서 빗물에 몸을 던졌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이 어깻죽지를 적셔들었다.

 가만히 길을 걷고 있으니 며칠간의 의문이 머릿속을 고즈넉이 휘저어댔다. 미야기를 찾는 이유, 연습시합 때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몇번이나 탈출을 감행했던 이유, 핸드폰의 요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연락을 주고 받는 이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의 끝은 온갖 곳으로 튀었다가도 마지막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츠키시마를 향했다.

 좋아해.
 누굴?

 홧홧한 열상이 속을 긁었다.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감정더미에 얻어맞은 몸이 알알히 아팠다. 그것은 갑작스러울 만큼 아득한 깨달음이었다. 여즉 외면하던 사실을 담은 입이 힐난이라도 하듯이 마음을 긁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디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깊이 찬 한 사람의 존재가 온 몸을 적셨다. 일 년 동안도 알지 못했던 시작을 이제서야 되짚으려니 머릿속이 까마득했다.

 언제부터 였을까. 되도 않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미야기로 향할 때? 맛있는 케이크 가게를 찾았다는 핑계로 츠키시마를 이끌고 도쿄를 돌아다닐 때? 책에 대한 소개를 주고받으며 문자를 할 때? 그것도 아니라면 여름 합숙의 마지막 날 밤, 우연히 마주친 얼굴을 돌려보내지 않고 밤산책을 나섰을 때? 개인시간차를 맞추자고 제안했을 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먼저, 합숙의 이튿날 눈에 밟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 안되잖아, 그건.

 제 감정의 추이를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폐부에 물이라도 부어 넣은 것처럼 먹먹한 감정에 숨이 막혀들었다. 이제서야 알아차린 사실을 토해내지 못한 열화가 진득히 목구멍에 늘어붙었다. 진탕 젖은 마음에 뒤섞인 말이 갈무리 되지 못하고 저를 휘둘러댔다.

 이따금씩 꼭 둘이 있을 때만 나오던 뜻모를 웃음은, 누군가의 이면을 봐버린 기분에 마치 죄를 짓는 듯하였다. 단단한 얼굴이 무너지고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면 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 수십, 수백번이고 스스로를 힐문했다. 급작스레 들이부어진 열화에 가슴 한켠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아로새긴 기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게 막연하고 너덜너덜한 조각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감정은 이제 노도가 되어 저를 덮쳐왔다. 속절없이 쳐내린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츠키시마의 시선이 머문 자리마다 더운 열꽃이 피었다. 아카아시는 수십, 수백번이고 그 눈길에 난도당했다. 외면할수록 저 끝까지 몰아 세워지고 또 살라내어졌던 이름 자가 성긴 마음 깊숙히에 늘어붙었다. 내내토록 고민해왔던 관계의 끝은, 기어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결론에 도달했다.

 어느새 교복은 비에 홀딱 젖었다. 진탕 젖어 물이 베어 들었다. 언제 젖었는지도 모르게 조금씩 그 면적을 넓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부터 발 끝까지 빗물이 감겼다. 아카아시는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제 감정을 치미는 열화와 함께 급히 삼켜버리고, 느릿하게 옮기던 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운동화의 앞코가 진흙을 덮어 썼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면 빠르게 덮쳐오는 감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길을 빠져 나왔다.

* * *

 만나는 빈도가 산발적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았던 장소를 이주, 삼주 가 넘도록 찾지 않게 되었다. 목도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일임을 떠넘기듯 한 사람의 존재를 버려둔 채 도망질을 쳤다. 그렇게 미야기를 가지 않은 지 한 달이 되는 날에, 눈에 익은 번호를 지웠다. 치미는 감정을 목구멍 너머로 욱여넣으며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거야.

 혼란에 가까운 감정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그날 이후로 스무 밤을 앓았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뒤돌아 외면해 버렸다. 츠키시마를 이끌고 다니던 길을 지날 적이면 점철된 기억이 하나씩 수면위로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뜨끔해지는 가슴 한켠을 지그시 내리 누르고, 애써 앞만 보며 걸었다.

 아픔이 무뎌지고 닳아빠진 기억이 지평선 너머에 걸릴 때 즈음에, 절절하던 고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 왔다. 졸업식이었다.

 처절하게 앓아넘긴 열 아홉의 여름은 채 갈무리 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았다. 까슬해진 입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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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츠키 ::




소재멘트 :: 아마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까.







 벚꽃향이 물씬 피어오르는 길가는 벌써부터 꽃놀이 따위를 나선 이들로 번잡하였다. 시끄러운 것이라면 지난 오 년간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사람 나름인가보다. 아카아시는 어수선한 인파를 헤치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시끄러운 사람은 하나로도 족하다며 혼잣말을 혀 끝에 굴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낯익은 인영이 시야에 들었다.


 아. 마치 잠잠하던 수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뇌중의 구석에 저민 기억이 요동치듯 부상해 올랐다. 익숙한 낯이 들은 시야가 한순간 아득하게 멀어졌다.


 츠키시마 케이. 그 해 여름, 아카아시를 열상의 한 가운데에 밀어넣고 저 끝까지 살라내었던 열아홉 하고도 열여덟 반의 주인공. 차마 무엇이라 칭하기 힘든 감정에 허우대며 쏟아지는 혼란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던 열아홉 봄의 제가, 아카아시는 불현듯 떠올랐다.


 느릿하게 틀어지는 시선이 채 넘어가지 못하고 한 구석에 고정되었다. 저를 발견한 것임이 분명한 눈이 맞닥뜨려졌다. 회녹빛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잿빛 기억을 비집고 온갖 색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잦았던 연락이 사그라들고 사실 모두 꿈이었더라는 어딘가의 허무한 종장처럼, 맹물같은 여운만을 남긴 채 죽었던 시간이 다시금 개화했다. 마주친 시야 너머로 연분홍빛 꽃잎이 하느작거리며 감겨드는 듯 하였다.


 적잖이 당황한 듯 여유없이 구르는 눈동자가 비쳤다. 그러나 피하지 않은채, 되레 고개를 바로 들어 단정한 눈을 다잡고 저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걸음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지막 여섯 걸음 정도의 틈을 남기고 걸음을 멈추었을 때, 질척한 감정이 물살쳐 올랐다.




 아마도, 나는 너를 좋아했었나 보다.




§




 츠키시마는 홉뜬 눈을 바로 떴다. 눈 앞의 사내가 깨어있는 현실에 이질감을 불어넣었다. 연락이 끊긴 것이 열 여덟의 여름이었으니, 이게 일년 반만이네. 어지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은 침착히 수를 셌다. 바로 마주한 얼굴이 오랜만임에도 같아서, 패인 볼우물 위로 마른 웃음이 그려졌다.


 당신은 하나도 변하질 않았네요.


 귀를 조금 덮을 듯 하던 뻗친 머리도, 눈꺼풀을 내린 나른한 눈도, 길게 뻗은 손 하며 반만 드러낸 이마 까지도. 그립다 못해 시렵게 가슴을 후벼파던 낯이 익숙해서, 눈두덩이가 뜨끈해졌다.


 주춤, 물러서려던 기색을 틀었다. 마주한 눈으로 그지없이 저를 눈에 담으며 옮기는 걸음이 급했다. 마치 한눈을 팔면 어딘가로 사라질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골이 났다. 나의 열여덟은 당신이 남기고 간 빈 조각이 무성한 퍼즐과 함께 끝났는데, 홀연히 사라져버린 주제에 왜 이제와 머릿속을 헤집어 놓느냐고.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잘게 들이 삼켰다.


 “츠키시마.”


 담백한 목소리가 귓등성이를 타고 돌았다. 왜요. 다물린 목소리의 끝이 조금 뒤집혔다. 여전한 웃음을 덧그리는 입매에 채 다듬지 못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울음을 삼킨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감겨들었다. 달싹이던 입이 멈추고 시선이 멎은 자리에 꼭 한 사람의 인영이 담겼다. 좋아했었나봐. 익숙한 발음을 덧그리는 입을 보고싶지 않아서,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잃어버렸던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기억이 물밀듯 차올랐다. 자맥질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설킨 마음이 시렸다.


 좋아했었다고.


 기억은 이제 혼란에 가까워졌다. 이제와서 저 말을 하는 저의를 도무지 모르겠다며 츠키시마는 간헐적으로 고개를 쳐냈다.


 “가지고 놀지 말아요.”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러는거 아니에요. 뒷말은 굳이 덧대지 않았다. 아리게 웃는 얼굴이 눈에 담겼다. 츠키시마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왜, 이제와서,”


 나를 헤집어놔요. 뚝뚝 끊어져나오는 음절이 진탕 녹아 목구멍 너머로 흐너져내렸다. 비적비적 새어나오는 울음에 목이 잠겼다. 처절했던 열여덟의 초상. 멋대로 다가와서 멋대로 비집어 들어오고 멋대로 사라져버린 주제에 멋대로 제 속에 남아서 그리도 저를 헤집어 놓았더랬다. 잃어버렸던 마지막 조각을 이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들이미는 눈 앞의 사내를 향해 서슬퍼런 시선을 흘겼다.


 답이 오지 않는 문자를 하루, 이틀, 나흘, 일주일동안 부단히도 보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걱정과 초조함으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한달을 넘겨갈 무렵에서야, 번호가 바뀌었다는 답문을 받고 다정했던 사람의 부재를 알았다. 지독한 상실감. 작금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오만가지의 감정이 스러지났다. 갈피를 잃은 미성년의 틈에서, 아무리 신경을 집중시켜도 그 혼란과도 같은 감정을 더듬어갈 수 없었다.


 제 고교시절의 모든 계절을 타오르는 열화로 물들이던 이는 서늘하게 식은 빈자리만 남긴 채 곁을 떠났다. 선명해지는 기억들 사이로 범람하는 상실의 감각이 가슴께로 질러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에게 잠겨있었더라고. 뒤늦게서야 깨달은 마음은 전할 곳 없이 갈피를 잃고 허공으로 부서져 내렸다. 아카아시 케이지. 익숙한 발음이 쓰게 혀끝을 저몄다.


 울컥, 눈물이 찼다. 달아오른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 말을 했다간 꼴사납게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급하게 몸을 틀었다. 따라오려는 기색이 덧붙었으나 붙잡는 손은 없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가르고 지나가는 걸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공원을 나선 다음에서야, 츠키시마는 걸음을 멈췄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자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연락처의 맨 밑바닥에 잠긴 번호가 아른아른 눈 앞을 가렸다.




회자정리 ::





 벚꽃의 초봉(初峰)만 같이 수줍게 설레는 색감을 틔우던 인연은 어느새 해지고 깎여 바람에 휩쓸릴 날만을 앞두고 있었다. 거창한 시련 따위가 아니어도 너덜하게 낡아버린 감정은 아마 작은 입김에조차 힘없이 흩날리리라. 츠키시마는 끝이 다 갈라진 회갈색 낙엽을 운동화의 앞코로 짓이겼다. 힘없이 바스라지는 나뭇잎의 모양새가 꼭 제가 아는 관계를 닮아 성마른 웃음이 비적비적 새어 나왔다. 서늘해진 공기에 밭은 기침이 났다. 제 속에 늘어붙은 감정도 숨과 함께 쉬이 뱉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진탕 녹아 흐너져내린 음절들이 토해내지 못한 열화에 뒤섞여 목을 옥죄었다. 숨이 텁텁 막혀들 만큼 감내하기 버거운 덩어리가 녹진히 그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련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한 감정에 허우대는 스스로의 모양새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별의 말이 자꾸만 입안에 고여 혀 끝을 저몄다.


 쿠로오 테츠로와 츠키시마 케이는 연인 사이였다. 학창 시절의 접점을 계기로 하여 시작된 인연은 어린 날의 멋모르는 치기라 부르기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져서, 스물세 살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탓에 세월의 풍랑에 깎여 부스러지고 있기는 했지만. 여즉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사실 어쩌면 사이였다는 과거형의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을는지도 모를 일일까. 달갑지 않은 사실 하나를 머리 한 구석으로 욱여넣으려 애쓰며, 그는 굳은 낯 위로 아무렇지 않은 척 가식으로 엮은 가면을 뒤집어 썼다.


 이미 그가 저에게 연인이 있다고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게 된 지도 어느 정도 되었던 참이었다. 막 성인이 되고 성인식을 연인으로부터 축복 받을 적만 하더라도 제법 열띤 모양새를 갖췄던 것 같은데. 성인식의 데이트, 장미, 그리고 키스. 설렘을 한아름 동반하였던 고백이나 절로 귀 끝이 달아오르게 만들던 간질간질한 미사여구 따위는 이미 아득한 추억으로 전락해 기억의 틈바구니 속 수많은 기억 아래 깔려, 간신히 아주 작은 부피로나마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든 장미의 끝은 버림 뿐이다. 츠키시마는 문득 그가 성인식 날 쿠로오로부터 받았던 장미 꽃다발이 무슨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또 꽃이 몇 송이나 되었는지 더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만큼 아득한 깨달음이었다.


 여전한 사랑을 말하는 입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조금 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그저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느냐와 온전히 수면 위로 드러났느냐의 차이가 존재했을 뿐이다. 대화의 끝에 수식어 마냥 따라붙는 고백이나 입맞춤 따위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달갑지 않게 되었다. 입을 맞추려는 낌새가 보이면 괜히 고개를 돌렸고, 말이 따라붙으려나 싶으면 제가 무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부러 말꼬리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이 저를 추궁하는 듯해 마음 한 쪽에 불편한 감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싫다고 하기에는 여태 붙들고 늘어진 관계와 상충되는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좋다고 하자니 어디에선가 밀려 올라오는 미묘한 거부감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렸다.


 츠키시마는 꾸역꾸역 치미는 생각을 집어넣으며 캘린더를 띄운 화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아직 빼곡히 남은 약속 날짜들을 세기가 버거워서 그조차도 오래 보지 못하고 그만 덮어버렸다. 내일 두 시에는 영화관 앞에서, 그리고 모레 열두 시엔 자주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 무슨 영화를 보자던 것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충 새로 나왔다던 멜로 영화였겠지. 아니, 아니다. 액션 영화였나? 코미디?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아마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만을 위한 약속 일정이 줄지어 있을 것이다. 약속을 잡은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 뿐인 두 사람의 약속. 이처럼 모순된 일이 또 있을까. 츠키시마는 파리하게 꺼져가는 감정의 끈을 애써 잡아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서린 시선 안에 아직도 제가 있다는 사실이 못내 거슬렸다. 쌍방향이 아닌 한쪽의 일방통행. 그런 연애가 오래 갈 수 있을 리 없다. 더는 예의로나마 말해줄 고백도 남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이 관계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봐야 서로 힘들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츠키시마는 오랜 관계가 주는 안락함과 이제는 당연해진 일상을 먼저 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츠키시마는 차선책을 택했다. 저 사람이 더는 날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모질게 굴겠다고. 제가 해야 할 말을 떠넘기고 돌아서서 귀를 닫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겁쟁이야. 그래, 나는 치사한 겁쟁이다. 저를 깎아 내림으로써 된 것이라며 그리 간결하게 합리화를 시켜버렸다. 다문 입술 끝에 맺힌 말이 치미는 응어리를 집요히 들쑤셨다.


 여전히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시야에 든 익숙한 잔상에 반사적으로 돌리려던 고개가 우뚝 멎었다. 그리고 한 순간, 시야가 죽었다. 지금은 안 돼. 멈춰 섰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달음박질. 첫 발은 우왕좌왕하는 사념에 끌리기라도 한 듯 내딛기가 버거웠지만 한 걸음을 뻗고 나니 그 후로는 쉬웠다. 잠시라도 속도를 늦추면 뒤따라오는 무언가에 잡혀버릴 것 같아 숨도 바로 쉬지 못하고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까무룩하게 암전 되었던 시야가 트이고서야 츠키시마는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봤을까, 못 봤겠지.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턱 끝까지 찬 말을 그대로 입 밖에 낼 것만 같아서 그가 제 뒤에 있을 리가 없는데도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들썩이던 몸이 멈추고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던 생각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저 끝까지 치달았던 감정 역시 차분해졌다. 츠키시마는 한 차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이미 마음 속에서는 수십 번이고 끝을 말했던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이어질 연애의 지속성을 그리는 것이 우스웠다.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고, 패인 볼우물 위로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내렸다.


 ‘츳키, 조금 마른 거 아니야?’


 그저께 아침 마주했던 얼굴은 한눈에도 보일 만큼 상해있었다. 누가 누구더러 하는 말이냐고 반박하려다 그만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괜찮다 얼버무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 같아서 다문 입이 마냥 썼다.


 쿠로오는 뭔가 신경 쓸 일이 생기면 제 몸에 소홀해지곤 했다. 특히 큰 일을 겪을 때에는 속으로 어지간히도 앓는 것인지 끼니조차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연애 초에는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되어 쿠로오에게 잔소리도 여러 차례 했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못했다. 결국 본인이 편해져야 하는 것인데 신경 쓸 일이 생길 때마다 몸에 밴 습관처럼 눈을 뜨기만 하면 고민거리만 떠올리느라 제 몸을 챙길 여유는 나지 않던 탓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츠키시마와 사귀고 어느 정도가 지난 후로는 머릿속 한켠에 늘 츠키시마가 자리하고 있게 되어 이것저것 다른 생각도 들어올 틈이 생겼더랬다. 쿠로오 본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는 최소한 끼니를 걸러가며 한 문제에 얽매이던 일은 없어졌다. 그랬던 그가 제 몸을 깎아가며 온 신경을 쏟아부을 일이 생겼다면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츠키시마 케이, 저일 것이었다. 뻔히 보일 만큼 달라진 태도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약았다고 할 만큼 눈치가 빨라서, 그 빠른 눈치에 당하는 경우도 빈번했었다. 그런 그가 먼저 이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아마 알면서도 눈을 감을 만큼 끓어오른 애정이 식지 못한 탓이리라. 새삼 되뇌인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쿠로오 테츠로는 츠키시마 케이를 좋아한다. 홧홧한 열기가 휘어감기던 체육관 안에서 신경을 긁을 것이 분명한 말들을 혀에 칭칭 감아내 츠키시마의 심기를 쿡쿡 건드릴 때부터, 쿠로오의 신경은 온통 그리로 귀결되어 있었다. 배구 선수로서 남달리 뛰어난 구석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나 왜인지 그냥 그랬다. 스스로가 알아채기도 전부터 쿠로오의 시선 끝에는 늘 츠키시마가 있었다. 이따금씩 딴 생각을 할 때에도 예외없이 떠오르는 건, 온갖 곳으로 튀었던 생각의 끝이 향하는 곳은 죄 약속이라도 한 듯 츠키시마였다. 알아차린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만 수십 일이 걸렸다. 여자도 아닌 사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드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라고 외면한 사실 아래에 질척하게 내려앉은 이름자가 더는 모른 척하기 힘들 만큼 커져서, 기어코 멈춰섰을 때엔 이미 츠키시마에게 머리 끝까지 잠겨들고도 남은 때였다.


 속전속결. 낯선 감정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뿐, 인정하고 나니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미적거리지 않았다. 속에 능구렁이를 몇 마리는 품은 듯한 사내가 작정하고 들이대는 것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십대의 무모함과 그 나이대 남자 아이들의 열띤 분위기. 츠키시마가 쿠로오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도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이상적인 연인의 표본을 따다 놓은 듯 아무런 문제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행복을 넘어선 도취감. 설렘이란 것이 이렇게 와닿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매 순간이 마치 꿈을 꾸는 양 들떴다. 제 손보다 조금 작은 손을 맞잡고 입을 맞추면, 내빼다가도 따라와 저를 찾는 몸짓이 좋았다. 기억조차 희끄무레한 어딘가의 첫키스 따위보다 인적 드문 길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시간이 더욱 행복하다 느끼던 때가, 언젠가 있긴 있었다.


 쿠로오와 보내는 시간이 따분함을 넘어서 무료하게 느껴질 때 즈음부터,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피했다. 잡은 약속을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옮기며 함께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쿠로오는 그럴 때마다 아쉽다는 티를 있는 대로 내풍기긴 했지만 결국엔 제 연인을 보내주었다. 돌아선 얄쌍한 등판에 따라붙는 시선은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혀 끝에 구르던 말은 끝끝내 입 밖으로 나지 못했다.


 약속을 잡을 때도 심드렁한 츠키시마의 태도를 쿠로오가 모를 리 없었다. 그저 모른 척 눈을 감고 제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다. 7년 동안 해온 말을 마치 기정 사실인 양 제 안에 못 박아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메아리조차 없는 절절한 외침이었다.


 좋아해.


 그때 츠키시마는, 뭐라고 했었더라.




 쿠로오는 며칠 새에 눈에 띄게 상한 얼굴을 뜯어보았다. 거울에 비친 상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패여 있어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이럴 게 아니라 어디라도 나가자. 집에 있어봐야 이미 곯아터진 생각을 다시 헤집는 것밖에 더 할 것이 없었다. 찬 공기를 맞으면 조금이라도 정리가 될까 싶어서 가볍게 외투를 걸쳐입고 문을 나섰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내다보며 쿠로오는 금새 어둑해진 저녁 거리를 활보했다. 서늘해진 가을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났다. 벌써 추워질 때구나. 집과 학교, 그리고 예의상의 데이트 약속. 츠키시마와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진 기억은 머리 속에서도 까마득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제외하면 집을 나선 기억 역시 거의 없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몰두한 게 얼마만이더라.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도 없도록 제 안을 꽉 채운 한 사람의 존재에 숨이 막혔다. 먹먹해진 감정을 잘게 들이삼키며 드리워진 헤어짐의 조영을 외면해 걸었다.


 문득,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틀었다. 비긋이 내다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공허를 헤집던 시선이 멎었다. 다급히 눈을 피하며 도망치듯 뛰어가는 뒷모습이 허망한 눈동자에 망울져 맺혔다. 거부의 의사임이 역력한 반응. 시야를 벗어난 잔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눈 앞에 내다놓은 듯이 선명해져서, 쿠로오는 그만 무거운 눈을 내리 감았다.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을 버젓이 눈 앞에 갖다놓은 듯한 기분에 지긋하던 집념은 체념에서, 그리고 절망으로 탈바꿈했다.


 헤어져야 하는 걸까.


 점철된 생각의 끝은 결국 같았다. 헤어짐. 이별. 어느 연인에게나 온다는 끝을 외면하면 피해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은 안일한 생각이었을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부던히도 모른 체 해왔으나, 눈 앞에 들이밀어진 진실을 보고도 눈을 돌릴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츠키시마 케이는 쿠로오 테츠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혹한 추위가 이어지는 겨울날에도 들끓는 애정이 더 너르던, 그렇기 때문에 인정하고야 말았던 사실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가정은 기어이 실태를 드러냈다. 의미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관계의 끈은 닳아 빠진 기억의 끄트머리에 남아, 메마른 빛 속에서 끊임없이 그 색을 잃어갔다. 기어코 끄집어낸 조각은 비참할 정도로 막연하고 너덜너덜한 것이 되어 있었다.


 걸음의 방향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했어도 나름대로 기분 좋게 느껴지던 바람이 몸을 벨 듯 거세게 몰아쳤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내딛는 발에 힘을 싣어 걸었다. 석양의 어둠을 틈타 무엇인가가 제 위를 무겁게 덮쳐 누르는 것도 같았다.


 츳키, 나한테 질렸어?


 마주 앉은 자리에서 핸드폰에 얼굴을 고정한 츠키시마를 보며,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뒷모습을 보며, 내리깔은 시선 끝의 운동화를 내다보며, 한번 쯤 묻고 싶던 말. 아니, 물었어야 했을 말.


 식어가는 감정을 붙잡고 처절하게 앓아 넘겼던 시간들이 뇌리를 스쳤다. 가까스로 태워 올리던 마른 감정이 꺼졌다. 소리도 없는 눈물이 번져서, 눈가가 눅눅히 젖어들었다.




§




 [시간 괜찮아?]


 츠키시마는 오늘 아침에 받은 문자를 재차 확인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해진 약속 날짜가 아닌 날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괜찮다고 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문자에는 익숙한 카페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연애 초에 자주 가던 카페.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희끄무레한 곳을 어떻게 여즉 기억하고 있었냐며 작게 혀를 찼다. 언제가 마지막 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듯이, 시간 감각이 늘어지고 뒤틀린 탓이었다.


 평일 오전의 카페는 한산함을 넘어서 적막했다.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은 테이블 위 사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마치 묽게 탄 먹을 바른 것처럼 하얀 벽을 물들였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이 벽 위에서 마구 엇갈렸다. 얼음이 반절 정도 채워진 컵 위로 물방울이 맺혀 흘렀다. 츠키시마는 그 모든 것을 느리게 시야에 담다, 문으로 고개를 틀었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키가 큰 사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는 얼굴이었다.


 “미안, 늦었지.”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며 들어서는 모습이 낯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한 낯짝이었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는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낯이었다. 그 원인을 꼽으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저일 것이 뻔했지만.


 쿠로오는 별다른 주문을 않고 맞은편의 의자를 빼 앉았다. 츠키시마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잘 빚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8년을 봐왔음에도 한결같이 잘나빠진 낯짝을 뜯어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막 사랑을 시작하던 풋풋한 마음이나 들끓는 애정이 없더라도 잘생긴 얼굴이나 단단한 몸 따위는 시선을 끌기 마련인가 보다. 한 때는 이 얼굴에 그리도 가슴이 뛰었더랬다. 설렘보다는 그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기준대로 제 연인을 보고 있다는 것에 까슬해진 입안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인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씹으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할 말을 찾으려 애쓸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이 못내 거슬렸다. 벗어나고 싶다. 그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듯이 불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침묵이 미세한 티끌처럼 온 몸을 뒤덮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멎은 것인지 벽 조차도 침묵을 지켰다. 슬슬 앉아있기조차 버거워질 무렵에,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츠키시마.”


 평소와는 다르게 불린 제 이름이 무겁게 귓등성이를 치고 올랐다. 낮게 깔린 음성에 반사적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침묵에 담긴 무게만큼 무지근한 시선이 지척에서 섞여들어 어지럽게 맞붙었다.


 아.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샜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이 시야에 담겼다.


 “우리, 헤어지자.”


* * *


 익숙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었다. 창가에서 부서져내린 햇살이 하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쿠로오는 잠시, 그 모습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몸이 더 잘 알고있는 창가 자리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연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아서, 별다른 주문은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한가로움을 넘어서 따분한 카페의 정경을 내다보다, 하얀 벽지를 펴바른 벽에서 츠키시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를 보는 눈빛은 달갑지 않다는 분위기를 내풍기고 있었다. 쿠로오는 한차례 더 시선을 굴리고, 입을 열었다.


 “츠키시마.”


 끝을 볼 심산으로 부른 이름 앞에서, 하얗게 시리도록 쥐어든 손 위로 파란 물이 멍울져 올랐다. 허물어진 마음 위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여즉 흘렸어야 했을 눈물을 어제 오늘에 다 쏟아내는 것 마냥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 할 말이 혀 끝에 고였을 뿐이다.


 “우리, 헤어지자.”


 지지부진하게 끌어오던 미련을 제 입으로 끝맺었다. 돌아올 말을 기다리며 쿠로오는 눅눅해진 눈을 깜작였다.


 “네.”


 나른한 목소리가 그만큼 쿠로오를 살라냈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느릿하게 끄덕여진 고개에 마음이 다쳤다. 다 내놓아 비어버린 한 켠이 쓰렸다. 무감하게 돌아서는 시선이 빈 마음을 시리게 저몄다.


 일어서려는 츠키시마를 잡아 앉히고, 머리가 어찔할만큼 지독한 향내를 피워내는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눈이 시리도록 붉은 색이 회녹빛 시야에 가득 담겼다. 츠키시마는 어물대던 입을 꾹 다물고, 꽃다발을 받았다.


 달그락.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고, 예의상의 인사치례가 눈에 들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눈에 익은 서러운 날갯죽지가 한차례 가슴을 쿵, 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씩 틀어지던 그때부터 어긋나 있었던게 아닐까. 위태로운 등이 익숙하다 느낄 때 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죽어있었고, 미련스러운 내가 그 잔흔을 쥐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쿠로오는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 감았다. 츠키시마가 빠져나간 빈 자리 위로 단 향이 감겨들었다.


 이제 끝이구나.


 맺혀 흐르던 컵의 표면이 성글게 말라붙었다. 다 주지도 못할 감정에 허덕이며 7년의 모든 계절을 온통 끓어오르는 애정으로 적시던 연애가 끝이 났다. 서늘하게 식은 빈자리가 설운 가슴을 울렸다. 너는 왜 원망할 수도 없게 끝의 끝까지도 달아서. 잔향이 남은 자리가 아팠다. 츠키시마가 난 자리는 한결같이 달았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보내주던 노란 가로등 밑의 헤어짐도, 수줍었던 첫 키스 이후 붉어진 얼굴을 급히 숨기려 돌아선 자리에도, 생채기가 난 곳을 수 없이 들쑤시던, 저 끝까지 몰아세워졌던, 그러고도 모자라서 기어이 저를 죽이던 종장 까지도.


 단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서우리만치 익숙해진 케이크며 디저트 따위의 단 맛이 불현듯 떠올랐다. 츠키시마의 옆을 지키며 종내에는 제가 찾게 되었던 단 향이 쓰려서, 쿠로오는 오래토록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만히 빈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 * *


 츠키시마는 붉은 장미다발을 품에 안고, 옮기던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바보 아냐? 누가 헤어지는 마당에 이런 선물을 주냐고. 입으로 쉼 없이 험악한 단어를 짓씹으며 옮기는 걸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슴이 델 것 같은 무구한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았기에, 그런 것이 제 속에 있다는 것 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시들어버린 장미를 다시 되살릴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관계라고. 스스로 정의내려 버린 사실을 마치 두 사람의 진실인 것 마냥 멋대로 생각해버리고 연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츳키, 성인식 축하해.’


 이렇게 많은 장미 다발을, 츠키시마는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한 송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애시당초 꽃 선물은 괜찮다고 말 했었잖아요.’

 ‘그래도 평생에 한번 뿐인 성인식인데 장미는 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그거 총 몇 송이인지 세볼 수 있겠어?’

 ‘……. 50송이?’

 ‘땡-. 51송이 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그래서요?’

 ‘장미꽃은 수에 따라서 꽃말이 변하거든. 한 송이는 당신은 나의 유일, 두 송이는 세상에서 두 사람 뿐, 세 송이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51송이는, 나의 마음 속에는 당신 밖에 없어.’

 ‘츳키, 사랑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부얘진 시야에 겹쳤다. 손을 들어 벅벅 문질러 닦으니 소매가 눅눅히 젖어들었다.


 ‘다음에는 108송이를 줄게.’


 나와 함께해주세요.


 입에 올렸던 말들,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은 마음, 잊혀져버린 약속, 실현되지못한 희망. 갈 곳을 잃은 손 끝에 장미 줄기가 걸렸다. 뭉글게 맺힌 핏방울이 손가락의 면을 타고 흘렀다.


 텅 빈 가슴에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어린 날과 같이 길을 걸었다. 자꾸만 스러지려는 꽃을 세게 끌어안으며 눈 앞에 어른거리는 잔상을 급히 지웠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기묘한 형태의 혼합물 같은 것이 들이 부어졌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몸과 머리처럼 느껴져서, 모든 것이 무겁고 막연했다. 눈두덩이가 뜨끈해졌다.


 말라붙은 눈가로 눈물이 밀려들었다. 잃어버렸던 조각들이 맞춰지듯이, 기억은 잔인하게도 끝을 보고 나서야 이면을 드러내었다. 오래 전에 사라졌던 가슴 벅찬 설렘이 퍼즐 조각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조각들이 못내 서러워서, 츠키시마는 그만 끌어안은 다발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었다.

쿠로츠키 :: reminiscence - 어렴풋한 기억. 추억.









성직자X피아니스트 AU






곱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유려히 피아노 건반을 두들긴다. 추색에 젖어들어 점점 짙어져가는 음색 너머로, 문득 기억 저편에 가라앉은 앙금이 뭉근히 피어오르는 듯하였다. 무언가 떠오를듯 말듯, 아무리 신경을 집중시켜도 그 미로와 같은 혼란을 제대로 더듬어갈 수 없었다. 그의 기도는 비천한 색이였어. 어디선가 날아든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멈췄다.

비천한 색?

비천한 색이란건 어떤거지. 제가 기억하는 그는 하얀 성직자였다. 때묻지 않은 순결하고도 고고한 빛을 지닌, 요즘 사람들 사이에선 쉬이 볼 수 없는 순수한 신앙심만으로 이루어진 사람. 내가 보아온 그는 어딘가 유리되어 있었나. 그것은 거대한 익명성에서 숨을 헉 삼키게 하는 심연으로의 놀랄만한 도약이였다. 사고의 방향이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메마른 빛 속에서 끊임없이 그 색을 잃어갔다.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창문 너머, 갈기갈기 찢겨나간 하늘의 한 토막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본래의 기억을 잃어버린듯한 칙칙한 파란색이였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는 그의 색이 얼룩져내리는 것과 같이, 쉼없이 덧칠되어 본질을 잃어갔다.



츠키시마 케이는 쿠로오 테츠로를 좋아했다.
그리고 쿠로오 테츠로는 성직자였다.

동성애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 몸을 담고 있는 그에게 배덕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을 들킨다면 그에게 죄악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츠키시마는 턱 끝까지 찬 진심을 급히 삼켜버렸다. 그것이 기어이 제 목을 옥죄게 될 지언정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쌍방향적인 것이었더라도 결국엔 이루어지지 못할 연정이었다.

상냥을 가장한 겉가죽에 흠뻑 잠겨버린 제게 쿠로오의 마음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제가 가진 진심을 숨기기에 급해서, 눈에 담기에도 버거운 사내를 그저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더랬다. 서린 시선 안에 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쿠로오가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이야기였다.

진탕 녹은 말이 채 갈무리되지 못하고 목 언저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부옇게 번져 오르던 햇살 위로 만물이 푸르게 생동감을 드러낼 즈음에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둑한 교회의 끝에 유난히도 빛을 발하던 당신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었다고.

피아노를 치던 손이 빨라졌다. 조금씩 힘을 싣기 시작한 움직임은, 종내에 다달아서는 두들기듯 거세게 건반을 쳐내렸다. 유려히 움직이던 선율이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 치달았다. 땀방울이 선명히 뺨을 타고 맺혀 흘렀다. 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이 울컥 올랐다.

이 내 마음은 죄악에 물든 것이야.

끝맺지 못한 마음이 갈피를 잃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빛바랜 연문이 마른 가슴을 타고 부서져내렸다. 좋아해요. 단 발음이 쓰게 혀 끝을 굴렀다. 어그러진 시간의 굴곡이 흉터로 저며들어 아문 자리마저 시리게 아팠다.

울음에 목구멍이 먹먹히 차들었다. 들끓는 애정처럼 여름 한철 태워내던 음성이 파리하게 꺼졌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빛도 끝내 점멸하면, 츠키시마는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소리도 없이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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