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츠키








소재멘트 :: 뒷모습


아카아시 케이지 X 츠키시마 케이





  투둑, 투두둑. 등굣길부터 시작된 비는 점점 몸집을 키워서 하굣길에 다다라서는 맞으면 살을 에릴 듯이 쏟아져내렸다. 츠키시마는 빈 손을 내려다보다 우산도 없이 길바닥에 몸을 던졌다. 빗방울이 닿은 곳마다 욱신거림이 퍼지는게 집에 도착할 즈음엔 멍이라도 들 것 같았다. 비에 젖어 뿌얘진 시야에 앞서 걸어가는 하얀 운동화가 들어왔다.


  우산 없는거 알면 좀 씌워주지.


  진흙을 잔뜩 덮어쓴 운동화의 밑창이 퍽 낯익었다. 수십, 수백번을 내려다본 당신의 운동화. 끝이 조금 뻗친 짧은 머리칼부터 선이 고운 허리까지, 당신의 등에 걸린 마른 근육을 말하라면 감히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당신의 뒷모습. 매정하게 돌아선 서늘한 어깻죽지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뒤따라 걷는 제 존재를 알면서도 모른 척 시선 한 점 주지 않는 뒷통수가 얄미웠다. 여지껏 잘만 봐놓고, 당신은 꼭 이럴 때에만 야박하더라. 토해내지 못한 열화가 진득히 목구멍에 늘어붙었다.


  알고 있으면서. 다 보고 있었으면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땅을 두들겨대는 비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나를, 내 뒷모습을, 그렇게 보고 있었잖아. 모를 줄 알았어요? 오늘만이 아니었지. 한껏 도취된 눈으로, 내가 당신을 봐온 시간 동안 당신도 날 봐왔잖아. 어딜가나 검질기게 따라붙던 시선. 비쩍 골은 어깻죽지가 시릴 만큼 지켜봐온 주제에 왜 모른 척을 해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나는 그리 착하지 않아요. 뒤늦게 고개를 돌려도 당신이 나를 내버려둔 시간 만큼 괴롭힐테니까. 나를 빗속에 버려두고 걸어간 이 길을 절대 잊지 않고 계속해서 들쑤실 거에요.


  다 알면서도 모른 척, 그저 못 본 척 넘기면 정말 지나갈 줄 알았을까. 부단히도 피하려 갖은 애를 쓰던 날들, 그러고도 기어이 나를 보던 형형한 눈. 바보. 그래도 내가 좋지. 외면 할 수록 더 깊게 내려앉는 이름 자를 몇 번이고 덧그리고 억눌렀을 당신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다. 말해봐요. 당신이 남긴 상흔으로 가득할 내 뒷모습을 보고 얼마나 이를 물었는지. 당신이 나를 채웠듯, 내 존재도 당신을 채우고 있는지.


  당신의 시선이 머문 자리마다 더운 열꽃이 피었다. 나는 수십, 수백번이고 그 눈빛에 난도당했다. 당신만이 알고 있을 선명한 열상. 잘 찢어진 시선 속 홧홧한 열화가 닿아 생긴 생채기가 번졌다. 얼룩져서 깊다랗게 내려 앉았다. 아아, 이제 조금 아픈데. 퍼붓는 낙수에 몸도 마음도 진탕 젖어서, 어지러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따금씩 나오던 토스 미스. 철처하던 당신의 얼굴이 무너지고 비껴나간 공을 사이에 둔 채 돌아가는 시선의 끝은 늘 제 쪽을 향했다. 알아차린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워서, 부러 눈을 피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돌아가는 시선이 언짢아서 더 당신을 몰아세웠다. 나를 좀 보라고, 집요히 당신을 좇고 또 물고 늘어졌다. 그랬는데. 그럴수록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태도가 오기를 건들였다. 기어이 빗길을 뚫고 당신을 쫓아갈 만큼. 그래, 내가 졌어요. 당신이 이겼어.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봐 줘요.


  악 다문 이 사이로 앓는 소리가 났다. 성긴 마음에 얽어진 시간이 속을 긁었다. 감정이 먹먹히 차들었다. 페부에 물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비를 타고 어지럽게 돌던 열화가 머리 끝까지 번지고, 돌연 시야가 죽었다. 찰박. 물소리가 요란했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바지가 찝찝하게 감겨들었다. 황급히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메는데, 문득 고개를 드니 하이얀 손이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가자, 데려다줄게.”


  회녹빛 눈동자에 가득 담긴 얼굴이 낯설었다. 나른하게 찢어진 눈매가, 잘 빚어진 콧잔등이, 엷은 입술이 생소해서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건네진 손 끝에도 열이 번졌다.


  “…늦었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고.”


  아카아시 케이지. 당신이 나를 끌어올려. 긴긴 시간을 돌아 이제서야 마주본 당신의 얼굴이 웃었다. 지나온 길바닥에 늘어진 물길이 멎었다. 시야를 채우던 당신의 뒷모습이 잘게 허물어져 내리고, 환한 얼굴이 그 위로 덧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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