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츠키 ::




소재멘트 :: 아마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까.







 벚꽃향이 물씬 피어오르는 길가는 벌써부터 꽃놀이 따위를 나선 이들로 번잡하였다. 시끄러운 것이라면 지난 오 년간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사람 나름인가보다. 아카아시는 어수선한 인파를 헤치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시끄러운 사람은 하나로도 족하다며 혼잣말을 혀 끝에 굴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낯익은 인영이 시야에 들었다.


 아. 마치 잠잠하던 수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뇌중의 구석에 저민 기억이 요동치듯 부상해 올랐다. 익숙한 낯이 들은 시야가 한순간 아득하게 멀어졌다.


 츠키시마 케이. 그 해 여름, 아카아시를 열상의 한 가운데에 밀어넣고 저 끝까지 살라내었던 열아홉 하고도 열여덟 반의 주인공. 차마 무엇이라 칭하기 힘든 감정에 허우대며 쏟아지는 혼란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던 열아홉 봄의 제가, 아카아시는 불현듯 떠올랐다.


 느릿하게 틀어지는 시선이 채 넘어가지 못하고 한 구석에 고정되었다. 저를 발견한 것임이 분명한 눈이 맞닥뜨려졌다. 회녹빛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잿빛 기억을 비집고 온갖 색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잦았던 연락이 사그라들고 사실 모두 꿈이었더라는 어딘가의 허무한 종장처럼, 맹물같은 여운만을 남긴 채 죽었던 시간이 다시금 개화했다. 마주친 시야 너머로 연분홍빛 꽃잎이 하느작거리며 감겨드는 듯 하였다.


 적잖이 당황한 듯 여유없이 구르는 눈동자가 비쳤다. 그러나 피하지 않은채, 되레 고개를 바로 들어 단정한 눈을 다잡고 저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걸음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지막 여섯 걸음 정도의 틈을 남기고 걸음을 멈추었을 때, 질척한 감정이 물살쳐 올랐다.




 아마도, 나는 너를 좋아했었나 보다.




§




 츠키시마는 홉뜬 눈을 바로 떴다. 눈 앞의 사내가 깨어있는 현실에 이질감을 불어넣었다. 연락이 끊긴 것이 열 여덟의 여름이었으니, 이게 일년 반만이네. 어지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은 침착히 수를 셌다. 바로 마주한 얼굴이 오랜만임에도 같아서, 패인 볼우물 위로 마른 웃음이 그려졌다.


 당신은 하나도 변하질 않았네요.


 귀를 조금 덮을 듯 하던 뻗친 머리도, 눈꺼풀을 내린 나른한 눈도, 길게 뻗은 손 하며 반만 드러낸 이마 까지도. 그립다 못해 시렵게 가슴을 후벼파던 낯이 익숙해서, 눈두덩이가 뜨끈해졌다.


 주춤, 물러서려던 기색을 틀었다. 마주한 눈으로 그지없이 저를 눈에 담으며 옮기는 걸음이 급했다. 마치 한눈을 팔면 어딘가로 사라질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골이 났다. 나의 열여덟은 당신이 남기고 간 빈 조각이 무성한 퍼즐과 함께 끝났는데, 홀연히 사라져버린 주제에 왜 이제와 머릿속을 헤집어 놓느냐고.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잘게 들이 삼켰다.


 “츠키시마.”


 담백한 목소리가 귓등성이를 타고 돌았다. 왜요. 다물린 목소리의 끝이 조금 뒤집혔다. 여전한 웃음을 덧그리는 입매에 채 다듬지 못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울음을 삼킨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감겨들었다. 달싹이던 입이 멈추고 시선이 멎은 자리에 꼭 한 사람의 인영이 담겼다. 좋아했었나봐. 익숙한 발음을 덧그리는 입을 보고싶지 않아서,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잃어버렸던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기억이 물밀듯 차올랐다. 자맥질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설킨 마음이 시렸다.


 좋아했었다고.


 기억은 이제 혼란에 가까워졌다. 이제와서 저 말을 하는 저의를 도무지 모르겠다며 츠키시마는 간헐적으로 고개를 쳐냈다.


 “가지고 놀지 말아요.”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러는거 아니에요. 뒷말은 굳이 덧대지 않았다. 아리게 웃는 얼굴이 눈에 담겼다. 츠키시마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왜, 이제와서,”


 나를 헤집어놔요. 뚝뚝 끊어져나오는 음절이 진탕 녹아 목구멍 너머로 흐너져내렸다. 비적비적 새어나오는 울음에 목이 잠겼다. 처절했던 열여덟의 초상. 멋대로 다가와서 멋대로 비집어 들어오고 멋대로 사라져버린 주제에 멋대로 제 속에 남아서 그리도 저를 헤집어 놓았더랬다. 잃어버렸던 마지막 조각을 이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들이미는 눈 앞의 사내를 향해 서슬퍼런 시선을 흘겼다.


 답이 오지 않는 문자를 하루, 이틀, 나흘, 일주일동안 부단히도 보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걱정과 초조함으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한달을 넘겨갈 무렵에서야, 번호가 바뀌었다는 답문을 받고 다정했던 사람의 부재를 알았다. 지독한 상실감. 작금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오만가지의 감정이 스러지났다. 갈피를 잃은 미성년의 틈에서, 아무리 신경을 집중시켜도 그 혼란과도 같은 감정을 더듬어갈 수 없었다.


 제 고교시절의 모든 계절을 타오르는 열화로 물들이던 이는 서늘하게 식은 빈자리만 남긴 채 곁을 떠났다. 선명해지는 기억들 사이로 범람하는 상실의 감각이 가슴께로 질러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에게 잠겨있었더라고. 뒤늦게서야 깨달은 마음은 전할 곳 없이 갈피를 잃고 허공으로 부서져 내렸다. 아카아시 케이지. 익숙한 발음이 쓰게 혀끝을 저몄다.


 울컥, 눈물이 찼다. 달아오른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 말을 했다간 꼴사납게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급하게 몸을 틀었다. 따라오려는 기색이 덧붙었으나 붙잡는 손은 없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가르고 지나가는 걸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공원을 나선 다음에서야, 츠키시마는 걸음을 멈췄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자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연락처의 맨 밑바닥에 잠긴 번호가 아른아른 눈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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