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내용의 조각글/2년 전 아카아시 시점









 아카아시 케이지는 멍한 머리로 수업을 따라가려 애썼다. 그렇지만 이미 머리를 가득히 메우고도 비져 나오려는 틈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루를 날렸다는 생각에 얼굴을 쓸며 창 밖을 내다 보는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교시를 알리는 종이 치고도 가는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꾸준히 땅을 적셨다.

 아카아시는 비가 오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꽤나 좋아했지만, 질척해진 땅이나 교복 밑단이 젖어드는 찝찝한 감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이었다. 가방의 맨 밑바닥에 접이식 우산을 들고 다녔으나 굳이 우산을 써야할 만큼 많은 양도 아니었고, 애써 정리해둔 것을 헤집어 놓기가 싫어서 빗물에 몸을 던졌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이 어깻죽지를 적셔들었다.

 가만히 길을 걷고 있으니 며칠간의 의문이 머릿속을 고즈넉이 휘저어댔다. 미야기를 찾는 이유, 연습시합 때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몇번이나 탈출을 감행했던 이유, 핸드폰의 요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연락을 주고 받는 이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의 끝은 온갖 곳으로 튀었다가도 마지막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츠키시마를 향했다.

 좋아해.
 누굴?

 홧홧한 열상이 속을 긁었다.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감정더미에 얻어맞은 몸이 알알히 아팠다. 그것은 갑작스러울 만큼 아득한 깨달음이었다. 여즉 외면하던 사실을 담은 입이 힐난이라도 하듯이 마음을 긁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디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깊이 찬 한 사람의 존재가 온 몸을 적셨다. 일 년 동안도 알지 못했던 시작을 이제서야 되짚으려니 머릿속이 까마득했다.

 언제부터 였을까. 되도 않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미야기로 향할 때? 맛있는 케이크 가게를 찾았다는 핑계로 츠키시마를 이끌고 도쿄를 돌아다닐 때? 책에 대한 소개를 주고받으며 문자를 할 때? 그것도 아니라면 여름 합숙의 마지막 날 밤, 우연히 마주친 얼굴을 돌려보내지 않고 밤산책을 나섰을 때? 개인시간차를 맞추자고 제안했을 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먼저, 합숙의 이튿날 눈에 밟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 안되잖아, 그건.

 제 감정의 추이를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폐부에 물이라도 부어 넣은 것처럼 먹먹한 감정에 숨이 막혀들었다. 이제서야 알아차린 사실을 토해내지 못한 열화가 진득히 목구멍에 늘어붙었다. 진탕 젖은 마음에 뒤섞인 말이 갈무리 되지 못하고 저를 휘둘러댔다.

 이따금씩 꼭 둘이 있을 때만 나오던 뜻모를 웃음은, 누군가의 이면을 봐버린 기분에 마치 죄를 짓는 듯하였다. 단단한 얼굴이 무너지고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면 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 수십, 수백번이고 스스로를 힐문했다. 급작스레 들이부어진 열화에 가슴 한켠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아로새긴 기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게 막연하고 너덜너덜한 조각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감정은 이제 노도가 되어 저를 덮쳐왔다. 속절없이 쳐내린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츠키시마의 시선이 머문 자리마다 더운 열꽃이 피었다. 아카아시는 수십, 수백번이고 그 눈길에 난도당했다. 외면할수록 저 끝까지 몰아 세워지고 또 살라내어졌던 이름 자가 성긴 마음 깊숙히에 늘어붙었다. 내내토록 고민해왔던 관계의 끝은, 기어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결론에 도달했다.

 어느새 교복은 비에 홀딱 젖었다. 진탕 젖어 물이 베어 들었다. 언제 젖었는지도 모르게 조금씩 그 면적을 넓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부터 발 끝까지 빗물이 감겼다. 아카아시는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제 감정을 치미는 열화와 함께 급히 삼켜버리고, 느릿하게 옮기던 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운동화의 앞코가 진흙을 덮어 썼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면 빠르게 덮쳐오는 감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길을 빠져 나왔다.

* * *

 만나는 빈도가 산발적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았던 장소를 이주, 삼주 가 넘도록 찾지 않게 되었다. 목도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일임을 떠넘기듯 한 사람의 존재를 버려둔 채 도망질을 쳤다. 그렇게 미야기를 가지 않은 지 한 달이 되는 날에, 눈에 익은 번호를 지웠다. 치미는 감정을 목구멍 너머로 욱여넣으며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거야.

 혼란에 가까운 감정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그날 이후로 스무 밤을 앓았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뒤돌아 외면해 버렸다. 츠키시마를 이끌고 다니던 길을 지날 적이면 점철된 기억이 하나씩 수면위로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뜨끔해지는 가슴 한켠을 지그시 내리 누르고, 애써 앞만 보며 걸었다.

 아픔이 무뎌지고 닳아빠진 기억이 지평선 너머에 걸릴 때 즈음에, 절절하던 고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 왔다. 졸업식이었다.

 처절하게 앓아넘긴 열 아홉의 여름은 채 갈무리 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았다. 까슬해진 입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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