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





 벚꽃의 초봉(初峰)만 같이 수줍게 설레는 색감을 틔우던 인연은 어느새 해지고 깎여 바람에 휩쓸릴 날만을 앞두고 있었다. 거창한 시련 따위가 아니어도 너덜하게 낡아버린 감정은 아마 작은 입김에조차 힘없이 흩날리리라. 츠키시마는 끝이 다 갈라진 회갈색 낙엽을 운동화의 앞코로 짓이겼다. 힘없이 바스라지는 나뭇잎의 모양새가 꼭 제가 아는 관계를 닮아 성마른 웃음이 비적비적 새어 나왔다. 서늘해진 공기에 밭은 기침이 났다. 제 속에 늘어붙은 감정도 숨과 함께 쉬이 뱉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진탕 녹아 흐너져내린 음절들이 토해내지 못한 열화에 뒤섞여 목을 옥죄었다. 숨이 텁텁 막혀들 만큼 감내하기 버거운 덩어리가 녹진히 그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련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한 감정에 허우대는 스스로의 모양새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별의 말이 자꾸만 입안에 고여 혀 끝을 저몄다.


 쿠로오 테츠로와 츠키시마 케이는 연인 사이였다. 학창 시절의 접점을 계기로 하여 시작된 인연은 어린 날의 멋모르는 치기라 부르기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져서, 스물세 살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탓에 세월의 풍랑에 깎여 부스러지고 있기는 했지만. 여즉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사실 어쩌면 사이였다는 과거형의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을는지도 모를 일일까. 달갑지 않은 사실 하나를 머리 한 구석으로 욱여넣으려 애쓰며, 그는 굳은 낯 위로 아무렇지 않은 척 가식으로 엮은 가면을 뒤집어 썼다.


 이미 그가 저에게 연인이 있다고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게 된 지도 어느 정도 되었던 참이었다. 막 성인이 되고 성인식을 연인으로부터 축복 받을 적만 하더라도 제법 열띤 모양새를 갖췄던 것 같은데. 성인식의 데이트, 장미, 그리고 키스. 설렘을 한아름 동반하였던 고백이나 절로 귀 끝이 달아오르게 만들던 간질간질한 미사여구 따위는 이미 아득한 추억으로 전락해 기억의 틈바구니 속 수많은 기억 아래 깔려, 간신히 아주 작은 부피로나마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든 장미의 끝은 버림 뿐이다. 츠키시마는 문득 그가 성인식 날 쿠로오로부터 받았던 장미 꽃다발이 무슨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또 꽃이 몇 송이나 되었는지 더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만큼 아득한 깨달음이었다.


 여전한 사랑을 말하는 입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조금 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그저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느냐와 온전히 수면 위로 드러났느냐의 차이가 존재했을 뿐이다. 대화의 끝에 수식어 마냥 따라붙는 고백이나 입맞춤 따위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달갑지 않게 되었다. 입을 맞추려는 낌새가 보이면 괜히 고개를 돌렸고, 말이 따라붙으려나 싶으면 제가 무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부러 말꼬리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이 저를 추궁하는 듯해 마음 한 쪽에 불편한 감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싫다고 하기에는 여태 붙들고 늘어진 관계와 상충되는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좋다고 하자니 어디에선가 밀려 올라오는 미묘한 거부감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렸다.


 츠키시마는 꾸역꾸역 치미는 생각을 집어넣으며 캘린더를 띄운 화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아직 빼곡히 남은 약속 날짜들을 세기가 버거워서 그조차도 오래 보지 못하고 그만 덮어버렸다. 내일 두 시에는 영화관 앞에서, 그리고 모레 열두 시엔 자주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 무슨 영화를 보자던 것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충 새로 나왔다던 멜로 영화였겠지. 아니, 아니다. 액션 영화였나? 코미디?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아마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만을 위한 약속 일정이 줄지어 있을 것이다. 약속을 잡은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 뿐인 두 사람의 약속. 이처럼 모순된 일이 또 있을까. 츠키시마는 파리하게 꺼져가는 감정의 끈을 애써 잡아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서린 시선 안에 아직도 제가 있다는 사실이 못내 거슬렸다. 쌍방향이 아닌 한쪽의 일방통행. 그런 연애가 오래 갈 수 있을 리 없다. 더는 예의로나마 말해줄 고백도 남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이 관계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봐야 서로 힘들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츠키시마는 오랜 관계가 주는 안락함과 이제는 당연해진 일상을 먼저 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츠키시마는 차선책을 택했다. 저 사람이 더는 날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모질게 굴겠다고. 제가 해야 할 말을 떠넘기고 돌아서서 귀를 닫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겁쟁이야. 그래, 나는 치사한 겁쟁이다. 저를 깎아 내림으로써 된 것이라며 그리 간결하게 합리화를 시켜버렸다. 다문 입술 끝에 맺힌 말이 치미는 응어리를 집요히 들쑤셨다.


 여전히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시야에 든 익숙한 잔상에 반사적으로 돌리려던 고개가 우뚝 멎었다. 그리고 한 순간, 시야가 죽었다. 지금은 안 돼. 멈춰 섰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달음박질. 첫 발은 우왕좌왕하는 사념에 끌리기라도 한 듯 내딛기가 버거웠지만 한 걸음을 뻗고 나니 그 후로는 쉬웠다. 잠시라도 속도를 늦추면 뒤따라오는 무언가에 잡혀버릴 것 같아 숨도 바로 쉬지 못하고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까무룩하게 암전 되었던 시야가 트이고서야 츠키시마는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봤을까, 못 봤겠지.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턱 끝까지 찬 말을 그대로 입 밖에 낼 것만 같아서 그가 제 뒤에 있을 리가 없는데도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들썩이던 몸이 멈추고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던 생각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저 끝까지 치달았던 감정 역시 차분해졌다. 츠키시마는 한 차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이미 마음 속에서는 수십 번이고 끝을 말했던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이어질 연애의 지속성을 그리는 것이 우스웠다.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고, 패인 볼우물 위로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내렸다.


 ‘츳키, 조금 마른 거 아니야?’


 그저께 아침 마주했던 얼굴은 한눈에도 보일 만큼 상해있었다. 누가 누구더러 하는 말이냐고 반박하려다 그만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괜찮다 얼버무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 같아서 다문 입이 마냥 썼다.


 쿠로오는 뭔가 신경 쓸 일이 생기면 제 몸에 소홀해지곤 했다. 특히 큰 일을 겪을 때에는 속으로 어지간히도 앓는 것인지 끼니조차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연애 초에는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되어 쿠로오에게 잔소리도 여러 차례 했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못했다. 결국 본인이 편해져야 하는 것인데 신경 쓸 일이 생길 때마다 몸에 밴 습관처럼 눈을 뜨기만 하면 고민거리만 떠올리느라 제 몸을 챙길 여유는 나지 않던 탓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츠키시마와 사귀고 어느 정도가 지난 후로는 머릿속 한켠에 늘 츠키시마가 자리하고 있게 되어 이것저것 다른 생각도 들어올 틈이 생겼더랬다. 쿠로오 본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는 최소한 끼니를 걸러가며 한 문제에 얽매이던 일은 없어졌다. 그랬던 그가 제 몸을 깎아가며 온 신경을 쏟아부을 일이 생겼다면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츠키시마 케이, 저일 것이었다. 뻔히 보일 만큼 달라진 태도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약았다고 할 만큼 눈치가 빨라서, 그 빠른 눈치에 당하는 경우도 빈번했었다. 그런 그가 먼저 이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아마 알면서도 눈을 감을 만큼 끓어오른 애정이 식지 못한 탓이리라. 새삼 되뇌인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쿠로오 테츠로는 츠키시마 케이를 좋아한다. 홧홧한 열기가 휘어감기던 체육관 안에서 신경을 긁을 것이 분명한 말들을 혀에 칭칭 감아내 츠키시마의 심기를 쿡쿡 건드릴 때부터, 쿠로오의 신경은 온통 그리로 귀결되어 있었다. 배구 선수로서 남달리 뛰어난 구석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나 왜인지 그냥 그랬다. 스스로가 알아채기도 전부터 쿠로오의 시선 끝에는 늘 츠키시마가 있었다. 이따금씩 딴 생각을 할 때에도 예외없이 떠오르는 건, 온갖 곳으로 튀었던 생각의 끝이 향하는 곳은 죄 약속이라도 한 듯 츠키시마였다. 알아차린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만 수십 일이 걸렸다. 여자도 아닌 사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드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라고 외면한 사실 아래에 질척하게 내려앉은 이름자가 더는 모른 척하기 힘들 만큼 커져서, 기어코 멈춰섰을 때엔 이미 츠키시마에게 머리 끝까지 잠겨들고도 남은 때였다.


 속전속결. 낯선 감정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뿐, 인정하고 나니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미적거리지 않았다. 속에 능구렁이를 몇 마리는 품은 듯한 사내가 작정하고 들이대는 것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십대의 무모함과 그 나이대 남자 아이들의 열띤 분위기. 츠키시마가 쿠로오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도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이상적인 연인의 표본을 따다 놓은 듯 아무런 문제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행복을 넘어선 도취감. 설렘이란 것이 이렇게 와닿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매 순간이 마치 꿈을 꾸는 양 들떴다. 제 손보다 조금 작은 손을 맞잡고 입을 맞추면, 내빼다가도 따라와 저를 찾는 몸짓이 좋았다. 기억조차 희끄무레한 어딘가의 첫키스 따위보다 인적 드문 길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시간이 더욱 행복하다 느끼던 때가, 언젠가 있긴 있었다.


 쿠로오와 보내는 시간이 따분함을 넘어서 무료하게 느껴질 때 즈음부터,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피했다. 잡은 약속을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옮기며 함께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쿠로오는 그럴 때마다 아쉽다는 티를 있는 대로 내풍기긴 했지만 결국엔 제 연인을 보내주었다. 돌아선 얄쌍한 등판에 따라붙는 시선은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혀 끝에 구르던 말은 끝끝내 입 밖으로 나지 못했다.


 약속을 잡을 때도 심드렁한 츠키시마의 태도를 쿠로오가 모를 리 없었다. 그저 모른 척 눈을 감고 제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다. 7년 동안 해온 말을 마치 기정 사실인 양 제 안에 못 박아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메아리조차 없는 절절한 외침이었다.


 좋아해.


 그때 츠키시마는, 뭐라고 했었더라.




 쿠로오는 며칠 새에 눈에 띄게 상한 얼굴을 뜯어보았다. 거울에 비친 상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패여 있어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이럴 게 아니라 어디라도 나가자. 집에 있어봐야 이미 곯아터진 생각을 다시 헤집는 것밖에 더 할 것이 없었다. 찬 공기를 맞으면 조금이라도 정리가 될까 싶어서 가볍게 외투를 걸쳐입고 문을 나섰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내다보며 쿠로오는 금새 어둑해진 저녁 거리를 활보했다. 서늘해진 가을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났다. 벌써 추워질 때구나. 집과 학교, 그리고 예의상의 데이트 약속. 츠키시마와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진 기억은 머리 속에서도 까마득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제외하면 집을 나선 기억 역시 거의 없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몰두한 게 얼마만이더라.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도 없도록 제 안을 꽉 채운 한 사람의 존재에 숨이 막혔다. 먹먹해진 감정을 잘게 들이삼키며 드리워진 헤어짐의 조영을 외면해 걸었다.


 문득,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틀었다. 비긋이 내다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공허를 헤집던 시선이 멎었다. 다급히 눈을 피하며 도망치듯 뛰어가는 뒷모습이 허망한 눈동자에 망울져 맺혔다. 거부의 의사임이 역력한 반응. 시야를 벗어난 잔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눈 앞에 내다놓은 듯이 선명해져서, 쿠로오는 그만 무거운 눈을 내리 감았다.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을 버젓이 눈 앞에 갖다놓은 듯한 기분에 지긋하던 집념은 체념에서, 그리고 절망으로 탈바꿈했다.


 헤어져야 하는 걸까.


 점철된 생각의 끝은 결국 같았다. 헤어짐. 이별. 어느 연인에게나 온다는 끝을 외면하면 피해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은 안일한 생각이었을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부던히도 모른 체 해왔으나, 눈 앞에 들이밀어진 진실을 보고도 눈을 돌릴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츠키시마 케이는 쿠로오 테츠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혹한 추위가 이어지는 겨울날에도 들끓는 애정이 더 너르던, 그렇기 때문에 인정하고야 말았던 사실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가정은 기어이 실태를 드러냈다. 의미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관계의 끈은 닳아 빠진 기억의 끄트머리에 남아, 메마른 빛 속에서 끊임없이 그 색을 잃어갔다. 기어코 끄집어낸 조각은 비참할 정도로 막연하고 너덜너덜한 것이 되어 있었다.


 걸음의 방향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했어도 나름대로 기분 좋게 느껴지던 바람이 몸을 벨 듯 거세게 몰아쳤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내딛는 발에 힘을 싣어 걸었다. 석양의 어둠을 틈타 무엇인가가 제 위를 무겁게 덮쳐 누르는 것도 같았다.


 츳키, 나한테 질렸어?


 마주 앉은 자리에서 핸드폰에 얼굴을 고정한 츠키시마를 보며,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뒷모습을 보며, 내리깔은 시선 끝의 운동화를 내다보며, 한번 쯤 묻고 싶던 말. 아니, 물었어야 했을 말.


 식어가는 감정을 붙잡고 처절하게 앓아 넘겼던 시간들이 뇌리를 스쳤다. 가까스로 태워 올리던 마른 감정이 꺼졌다. 소리도 없는 눈물이 번져서, 눈가가 눅눅히 젖어들었다.




§




 [시간 괜찮아?]


 츠키시마는 오늘 아침에 받은 문자를 재차 확인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해진 약속 날짜가 아닌 날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괜찮다고 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문자에는 익숙한 카페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연애 초에 자주 가던 카페.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희끄무레한 곳을 어떻게 여즉 기억하고 있었냐며 작게 혀를 찼다. 언제가 마지막 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듯이, 시간 감각이 늘어지고 뒤틀린 탓이었다.


 평일 오전의 카페는 한산함을 넘어서 적막했다.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은 테이블 위 사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마치 묽게 탄 먹을 바른 것처럼 하얀 벽을 물들였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이 벽 위에서 마구 엇갈렸다. 얼음이 반절 정도 채워진 컵 위로 물방울이 맺혀 흘렀다. 츠키시마는 그 모든 것을 느리게 시야에 담다, 문으로 고개를 틀었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키가 큰 사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는 얼굴이었다.


 “미안, 늦었지.”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며 들어서는 모습이 낯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한 낯짝이었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는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낯이었다. 그 원인을 꼽으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저일 것이 뻔했지만.


 쿠로오는 별다른 주문을 않고 맞은편의 의자를 빼 앉았다. 츠키시마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잘 빚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8년을 봐왔음에도 한결같이 잘나빠진 낯짝을 뜯어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막 사랑을 시작하던 풋풋한 마음이나 들끓는 애정이 없더라도 잘생긴 얼굴이나 단단한 몸 따위는 시선을 끌기 마련인가 보다. 한 때는 이 얼굴에 그리도 가슴이 뛰었더랬다. 설렘보다는 그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기준대로 제 연인을 보고 있다는 것에 까슬해진 입안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인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씹으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할 말을 찾으려 애쓸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이 못내 거슬렸다. 벗어나고 싶다. 그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듯이 불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침묵이 미세한 티끌처럼 온 몸을 뒤덮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멎은 것인지 벽 조차도 침묵을 지켰다. 슬슬 앉아있기조차 버거워질 무렵에,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츠키시마.”


 평소와는 다르게 불린 제 이름이 무겁게 귓등성이를 치고 올랐다. 낮게 깔린 음성에 반사적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침묵에 담긴 무게만큼 무지근한 시선이 지척에서 섞여들어 어지럽게 맞붙었다.


 아.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샜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이 시야에 담겼다.


 “우리, 헤어지자.”


* * *


 익숙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었다. 창가에서 부서져내린 햇살이 하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쿠로오는 잠시, 그 모습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몸이 더 잘 알고있는 창가 자리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연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아서, 별다른 주문은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한가로움을 넘어서 따분한 카페의 정경을 내다보다, 하얀 벽지를 펴바른 벽에서 츠키시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를 보는 눈빛은 달갑지 않다는 분위기를 내풍기고 있었다. 쿠로오는 한차례 더 시선을 굴리고, 입을 열었다.


 “츠키시마.”


 끝을 볼 심산으로 부른 이름 앞에서, 하얗게 시리도록 쥐어든 손 위로 파란 물이 멍울져 올랐다. 허물어진 마음 위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여즉 흘렸어야 했을 눈물을 어제 오늘에 다 쏟아내는 것 마냥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 할 말이 혀 끝에 고였을 뿐이다.


 “우리, 헤어지자.”


 지지부진하게 끌어오던 미련을 제 입으로 끝맺었다. 돌아올 말을 기다리며 쿠로오는 눅눅해진 눈을 깜작였다.


 “네.”


 나른한 목소리가 그만큼 쿠로오를 살라냈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느릿하게 끄덕여진 고개에 마음이 다쳤다. 다 내놓아 비어버린 한 켠이 쓰렸다. 무감하게 돌아서는 시선이 빈 마음을 시리게 저몄다.


 일어서려는 츠키시마를 잡아 앉히고, 머리가 어찔할만큼 지독한 향내를 피워내는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눈이 시리도록 붉은 색이 회녹빛 시야에 가득 담겼다. 츠키시마는 어물대던 입을 꾹 다물고, 꽃다발을 받았다.


 달그락.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고, 예의상의 인사치례가 눈에 들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눈에 익은 서러운 날갯죽지가 한차례 가슴을 쿵, 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씩 틀어지던 그때부터 어긋나 있었던게 아닐까. 위태로운 등이 익숙하다 느낄 때 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죽어있었고, 미련스러운 내가 그 잔흔을 쥐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쿠로오는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 감았다. 츠키시마가 빠져나간 빈 자리 위로 단 향이 감겨들었다.


 이제 끝이구나.


 맺혀 흐르던 컵의 표면이 성글게 말라붙었다. 다 주지도 못할 감정에 허덕이며 7년의 모든 계절을 온통 끓어오르는 애정으로 적시던 연애가 끝이 났다. 서늘하게 식은 빈자리가 설운 가슴을 울렸다. 너는 왜 원망할 수도 없게 끝의 끝까지도 달아서. 잔향이 남은 자리가 아팠다. 츠키시마가 난 자리는 한결같이 달았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보내주던 노란 가로등 밑의 헤어짐도, 수줍었던 첫 키스 이후 붉어진 얼굴을 급히 숨기려 돌아선 자리에도, 생채기가 난 곳을 수 없이 들쑤시던, 저 끝까지 몰아세워졌던, 그러고도 모자라서 기어이 저를 죽이던 종장 까지도.


 단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서우리만치 익숙해진 케이크며 디저트 따위의 단 맛이 불현듯 떠올랐다. 츠키시마의 옆을 지키며 종내에는 제가 찾게 되었던 단 향이 쓰려서, 쿠로오는 오래토록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만히 빈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 * *


 츠키시마는 붉은 장미다발을 품에 안고, 옮기던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바보 아냐? 누가 헤어지는 마당에 이런 선물을 주냐고. 입으로 쉼 없이 험악한 단어를 짓씹으며 옮기는 걸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슴이 델 것 같은 무구한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았기에, 그런 것이 제 속에 있다는 것 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시들어버린 장미를 다시 되살릴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관계라고. 스스로 정의내려 버린 사실을 마치 두 사람의 진실인 것 마냥 멋대로 생각해버리고 연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츳키, 성인식 축하해.’


 이렇게 많은 장미 다발을, 츠키시마는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한 송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애시당초 꽃 선물은 괜찮다고 말 했었잖아요.’

 ‘그래도 평생에 한번 뿐인 성인식인데 장미는 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그거 총 몇 송이인지 세볼 수 있겠어?’

 ‘……. 50송이?’

 ‘땡-. 51송이 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그래서요?’

 ‘장미꽃은 수에 따라서 꽃말이 변하거든. 한 송이는 당신은 나의 유일, 두 송이는 세상에서 두 사람 뿐, 세 송이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51송이는, 나의 마음 속에는 당신 밖에 없어.’

 ‘츳키, 사랑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부얘진 시야에 겹쳤다. 손을 들어 벅벅 문질러 닦으니 소매가 눅눅히 젖어들었다.


 ‘다음에는 108송이를 줄게.’


 나와 함께해주세요.


 입에 올렸던 말들,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은 마음, 잊혀져버린 약속, 실현되지못한 희망. 갈 곳을 잃은 손 끝에 장미 줄기가 걸렸다. 뭉글게 맺힌 핏방울이 손가락의 면을 타고 흘렀다.


 텅 빈 가슴에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어린 날과 같이 길을 걸었다. 자꾸만 스러지려는 꽃을 세게 끌어안으며 눈 앞에 어른거리는 잔상을 급히 지웠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기묘한 형태의 혼합물 같은 것이 들이 부어졌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몸과 머리처럼 느껴져서, 모든 것이 무겁고 막연했다. 눈두덩이가 뜨끈해졌다.


 말라붙은 눈가로 눈물이 밀려들었다. 잃어버렸던 조각들이 맞춰지듯이, 기억은 잔인하게도 끝을 보고 나서야 이면을 드러내었다. 오래 전에 사라졌던 가슴 벅찬 설렘이 퍼즐 조각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조각들이 못내 서러워서, 츠키시마는 그만 끌어안은 다발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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