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츠키 :: 무제






소재멘트 :: 가졌으니 됐어, 이젠 아무것도 필요없어





"안경군, 나랑 섹스하고나면 토하지?"

언젠가 그와 관계를 맺은 새벽,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불빛에 눈을 뜨니 츠키시마는 옆에 없었다. 불빛을 조심스레 따라가면 그는 안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을 더욱 창백히 굳힌 채로 구역질을 하며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물론, 오늘 새벽에도. 쿠로오는 그 일을 회상하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을 뱉었다. 다른 한 손으론 피아노 건반을 치듯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을 두드리자 타닥, 타다닥. 적막한 방에는 손끝이 책상에 부딫혀 생기는 소음만이 울렸다. 제 방 거울앞에서 저를 등지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 그의 여린 등판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리곤, 제법 얄쌍한 입술을 다시 한번 달싹였다.

"토 할 정도로 내가 싫어?"

색소가 옅은 뒷통수를 보고 있자니 저 작은 머리로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늘 무감정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어쩌다 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있는대로 얼굴을 구기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어차피 원래가 그런 사이였으니 그리 마음에 담을 일도 아니지만. 가끔, 그 눈이 괘씸하여 다가가 치부를 들추면 단정했던 페이스가 무너지며 재깍 반응이 오는게 재밌다고 생각했었다.

관계를 맺을 때에도, 저를 내려보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실없이 웃음을 흘리다 아프다 말하는 여린 몸뚱아리를 일으켜 그대로 침대에 처박아버리고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위로 올라타 입술을 맞대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터진 입술에선 피가 배어나왔다. 아프다고, 옅게 신음을 흘리는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아니, 정확히는 일그러진 얼굴에 코끝을 스치는 혈향이 퍽 야하다 생각한적도 제법 있었다. 아주 잠깐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동안, 그는 등을 돌려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린 쿠로오는 좁혔던 미간을 풀어내며 웃어보였다. 그와 반대로 츠키시마의 얼굴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고, 간단 명료하게 쿠로오의 질문에 답하였다.

"네."
"그-래?"
"네. 싫습니다. 아주 역겨워요. 당신만 보면 속이 뒤틀리고 짜증이 치밀어오릅니다."

면전에 대고 아무렇지않게 독설을 내뱉더니 다시 쿠로오에게서 등을 돌려 흐트러진 머릿결을 차분히한다. 거울에 비치는 사내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고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아 돌려 방을 나서려는 순간, 쿠로오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았다. 케이. 기름칠을 한 것 마냥 유들유들한 목소리는 그의 면상떼기 만큼이나 기분이 나빴다.

"이름 부르지마세요. 소름 돋아. 애초에 제 이름은 당신따위가 부르라고 있는게 아니에요."

츠키시마의 가시 돋친 말에 쿠로오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츠키시마는 더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쿠로오의 부름을 무시하고 방문을 열었다. 다시금, 케이. 더는 듣기 싫은 유들거리는 목소리가 또 한번 귓전을 울렸다.

"네가 싫어한다고 해도, 네 뒤를 봐주는건 나야."
"... 알고있어요."

젠장. 츠키시마는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몸을 대줌으로써 받는 낮동안의 평범한 삶. 츠키시마는 쿠로오가 '약속'을 읊을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의미없는 질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 끝까지 찬 물음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었다. 하고 많은 이들 중 왜 자신이었냐고.
쿠로오는 제가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는 시간의 겉가죽을 주었고, 자신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실정에서 정조 따위를 지키는 것은 사치였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을 잡은 파우스트가 이런 기분이였을까. 비참하고 비참한 삶의 끝자락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동앗줄은 썩어 문드러진 것. 우울과 환멸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려던 몸뚱아리는 건져 올린 자의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더이상 열리지 않을 입을 관망하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방을 나섰다.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반동으로 침대가 출렁이며 쿠로오의 몸도 흔들리는 것을 잠시. 이내 잠잠해지면, 쿠로오는 눈을 천천히 꿈뻑이며 천장을 응시하다가 이내, 푸흐ㅡ.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가졌으니 됐어. 이젠 아무것도 필요없어."

허공을 향해 움켜쥔 손에 잡히는건 없었지만, 쿠로오의 입매는 만족스런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쓴지 좀 된 글이라 수정을 해도 어휘가 영 떨어지네요 :(
일단 업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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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멘트 ::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느릿하게 틀어지던 이와이즈미의 고개가 멈추고, 시선이 멎은 자리에 퍽 익숙한 인영이 담겼다. 대형 스크린 너머로 시야에 들은 얼굴이 불현듯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점철된 기억의 끄트머리에 다달아서는 벌어진 입에서 아, 하고 탄성과도 비슷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게 아마, 8년 전이었던가. 잔잔한 수면 위로 잔물결처럼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패악스러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보다도 더 절절하게 끓어오르던 제 십대의 한 철을 타고도는 열화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은 이름자, 오이카와 토오루. 친구라니, 우습지도 않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볼 때마다 시커먼 마음 한켠에 진심을 구겨 넣고 차마 뱉지 못한 감정을 삭였다. 늘어붙어 성긴 마음에 난 생채기가 쓰렸다. 처절하게 속내를 숨기고 앓아넘긴 지가 어느덧 칠 년. 스무살이 되던 해의 졸업식 날, 이와이즈미는 기어코 수차례 제 속에서 누르고 짓씹어 퍼렇게 멍울진 말을 토해냈다.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힐난이라도 하듯이, 말이 지나간 자리에 열상이 일었다. 곤란하다는 기색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소꿉친구의 얼굴에 그제서야 어찔한 기분이 들었다.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살게 굳어진 얼굴이 그만큼 이와이즈미를 살라내었다. 돌아올 모를 말에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어색한 웃음을 그리는 입매가 채 떨어지기 전에 이와이즈미는 자리를 뛰쳐나왔다. 이와쨩!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돌아서 여느때보다도 다급하게 오이카와를 피했다. 그리고 그게, 이와이즈미 하지메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예정되어있던 이사. 이와이즈미는 번호를 바꾸고 새로운 메일 주소를 만들며, 들끓는 애정과 함께 오이카와 토오루의 번호가 저장된 핸드폰을 서랍 깊숙히 욱여넣었다. 어차피 외우고 있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었겠냐마는, 그만큼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잊는데에 필사적이었다. 이후로 어떤 연락이 왔을지, 연락이 오긴 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한 달, 두 달, 1년, 2년이 지나 일상에 치이고 닳아빠진 기억이 무뎌질 때 즈음, 다시금 눈길을 잡아챈 익숙한 낯짝이 잔잔한 수면위로 돌을 집어 던졌다. 이와이즈미는 차마 돌리지 못한 눈을 빠르게 바뀌어대는 화면에 고정했다. 가슴 한 켠이 먹먹이 차올랐다. 희미하게 번지던 열상이 선명히 드러났다. 잘나빠진 건 여전해가지고. 이와이즈미가 아닌 에이스에게 토스를 올리고, 화면을 향해 손을 저어보이며 으레 그 벙긋한 웃음을 그리는 낯이 한결같이도 잘났다.

두려워서 그랬다느니 하며 외면한 마음은 사실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었다. 고백을 받아줘, 그럼? 어쩌다 운 좋게 사귀게 되었대도, 그 다음은? 지금까지는 학생 때의 부활동으로 오이카와의 주춧돌이 되는 데에 그쳤지만, 대학에 가서도 오이카와의 토스를 받을 자격은 자신에게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배구에 특출나달 재능이 없었고, 스스로가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우시지마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최고로 만들어 줄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실 아주 오래전부터 자각한 사실이었음에도 기어코 오이카와의 디딤돌을 자처했던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이카와의 곁을 지킬 구실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배구는 그만둘거야.’

봄고전의 쓰린 패전의 날, 앞으로도 시간은 많다며 당차게 말하던 너에게 오랜시간 눌러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가온 고교 마지막 날,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 질척하게 엉겨붙어 있던 언사를 말했다.

다시 한 번 네 곁에 남을 구실이 필요했어. 친구라는 이름이 싫어서 오이카와 토오루의 에이스라는 이름을 빌려왔다. 더 이상 그 이름으로도 남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찌 보면 충동적이면서도 당연한 수순대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품었던 연정을 꺼내들었다. 그렇지만 만약 그 때 네가 고백을 받았더라면, 나는 다시 모른 척 네 곁을 지키고 있을 수 있었을까. 제대로 된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네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나는 웃으며 그러자 할 자신이 없었어. 더 높이, 학창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멀리 날 오이카와에게 결국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어떤 식으로건 걸림돌이 될 터였다. 친구.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거면 됐을텐데. 왜, 난. 울음을 삼킨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처절하게 앓아 넘긴 지난 날의 기억이 희게 질린 가슴께에 밀려들었다. 북받쳐 오른 감정이 왈칵, 넘쳤다. 결국 팔 년이 지나고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잊지 못했다. 무겁게 내려앉는 막연함에 흐려진 시야를 벅벅 문지르고 고개를 돌렸다.



“이와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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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표 2번, 이와오이.
중반부터 멘탈이 와장창 나서 좀 급히 마무리짓느라 수정이 엉망진창ㅠ 시험 끝나고 꼭 다시 건드릴겁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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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메이커 :: 애석한 느낌, 소나기
*첫 만남 시기 날조 (켄마 초6, 쿠로 중1)





소꿉친구. 어릴 적부터 따라붙던 꼬리표 같은 그것은 얼핏 보았을 땐 잘 포장된 관계 같았으나 실상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관계를 정의 내려 버리는 것이었다. 만난 지 6년, 꼬리말이 붙은 지는 3년. 병아리의 노란 색이나 너른 풀밭의 연두빛 색감을 띄던 풋내나는 시작과는 달리, 질펀이 녹아들어 제 삶 안에서 커져버린 한 사람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며 뒤돌아 걸은 것이 또 3년. 해를 지날 수록 잘나빠진 낯짝을 드러내기 시작한 소년에게 동한 것은, 비단 사춘기 소녀들 만이 아니었다. 소꿉친구. 코즈메는 그 발음이 참 떫다고 생각했다.
낙인 처럼 찍힌 관계를 가슴 한켠에 여미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잘게 찢어 넘겼다. 쿠로. 채 넘어가지 못한 말이 목울대에 질척하게 엉겨붙었다.

“응?”
“…비 오는데, 우산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을 두들겨대는 소나기가 시야에 들었다. 다행이야. 빗물에 흐너져내린 말이 진탕 녹아 목구멍 아래로 스러졌다.

“어라, 그러네? 아침에는 안온다더니…너는?”
“…있어.”

그럼 됐네. 사람 속도 모르고 벙긋한 웃음을 그려내는 낯이 얄미웠다. 들었던 고개를 수그리니 화면에는 커다랗게 ‘Game over’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쿠로오와 있을 때는 부활동 시간을 제하면 좀처럼 손에서 게임기를 놓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더라. 아마 열 다섯의 끝자락 부터. 아니, 어쩌면 열 네살, 열 세살의 앳되지만 마디 진 손을 잡고부터.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그 시선의 끝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네가 있었다. 알아차린 사실이 못내 버거워서, 코즈메는 좁다란 인공 화면에 진심을 묻었다.
-그런다고 꺼질 마음이 아니었는데도. 직면하기 거북한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종례시간이 다 가고도,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제 몸집을 키워댔다.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가 거셌다. 작은 비닐 조각 아래에 한창 때의 남고생 둘이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건지, 퍼붓는 낙수에 한쪽 어깨가 젖어들었다. 팔에 감겨드는 찝찝한 감각 보다도 옆에 선 으레 그 소꿉친구의 존재가 더 거슬렸다. 걸을 때마다 닿는 어깨며 손 따위가 불에 댄 듯 더웠다.
진흙에 젖은 신발의 밑창이 직직 늘어졌다. 질척하게 엉겨붙는 모양새가 퍽 제 속을 닮은 듯 하여 조소가 샜다.

“아, 다 왔다.”

점점 수그러드는 고개를 운동화의 앞코에 고정하고 간신히 돌아오는 말을 받아치는데, 문득 옆을 덥히던 열기가 가셨다. 아, 응.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선 뒷모습이 시야를 가렸다. 단단히 벌어진 어깻죽지에 채 다듬어지지 못한 감정이 울컥 올랐다.
홧홧한 열상이 속을 긁었다. 더운 기가 가신 자리에는 열창 대신 서늘한 오한이 들었다. 서운하다, 얄밉다, 너무하다. 한 단어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겹겹이 쌓이는 감정이 건조한 가슴께로 밀려들었다.

좋아해.

속을 드러낸 자리에 토기가 일었다. 메스꺼워. 한 사람이 빠져나간 공간 만큼 넓다래진 여백이 고까워서, 퍼붓는 장대비에 몸을 던졌다. 살이 아릴 정도로 쏟아지는 빗물보다도 감내하기 힘든 막막함이 빈 공간을 채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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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멘트 :: '조금 아픈 것 같아, 그뿐이야'
하나하나병 :: 혈관에서 꽃이 자라, 사랑을 받으면 받을 수록 악화되는 병.



마츠츠키 :: ハナハナ病




희었던 나무가 군데군데에 녹빛을 피어낼 때 즈음, 츠키시마 케이는 마츠카와 잇세이에게 이별을 고했다. 별다른 수식어나 미사여구 없이, 꼭 두 사람이 사귈 적 마냥 담백한 별사는 마츠카와로 하여금 상황을 이해하기 버겁게 만들었다. 둔해진 머리로 해엽처럼 생각이 들어차 올랐다. 우리, 그만해요. 마치 밥을 먹었냐고 물을 때처럼 평이한 어조로, 권태롭다 못해 지루한 목소리가 귓등성이를 어찔하게 울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알알했다.

마츠카와는 멍해진 머리로 츠키시마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그 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별이 면전에 놓인 상황임에도, 맞은편의 연인과 같이 덤덤한 얼굴을 한 마츠카와가 물었다. 왜. 츠키시마는 눈 하나 깜작이지 않고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것인 양 능하게 말을 받았다.

"평생 갈 것도 아니었고,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해서요."

여지껏 사귀었던 시간들이 별 것 아니었단 것처럼, 무더위보다도 후터분했던 관계는 사실 한순간의 치기에 불과했다는 듯한 츠키시마의 태도에 슬그머니 열화가 치밀었다. 그게 다야? 따져 묻는 어투에도 츠키시마는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익숙했던 단정한 말씨가 유난히도 귀에 거슬려서, 마츠카와는 그만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만하자.”

그걸로 끝이었다. 일 년이 조금 넘을까 하던 관계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허무하게, 그리고 이르게 종장을 보였다. 무심하게 돌아서는 시선이 츠키시마의 폐부를 깊숙히 살라내었다.


*

이걸로 됐어. 츠키시마는 제 안에 진득히 눌러두었던 감정을 잘게 들이삼켰다. 이거면 된거야. 먹먹한 숨을 토해내니 바스라진 꽃내음이 코끝 언저리를 머물다 흩어진다. 츠키시마는 마츠카와의 반듯한 뒷모습을 온 시야로 좇았다. 멀어지던 검은 점이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말간 회녹색 눈동자에 꼭 한 사람의 인영이 담겼다.

고즈넉이 가라앉아 파리하게 꺼져가는 숨에도 끈덕지게 늘어붙은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서, 그 사실이 못내 츠키시마를 서럽게 만들었다. 겨우 붙은 숨으로 끝을 말하고도 뚝뚝 떨어지는 미련이 성글게 말라붙었다.

짓물린 꽃잎이 잇새를 비집고 나와 역류해 오르고, 타고도는 핏물에 섞인 여린 잎은 기어이 혈류를 끊어놓았다. 마츠카와를 만나러 가기까지 울컥이던 감정은 사실 제 것이 아니었다는 양 비어버린 한 켠이 쓰렸다. 마츠카와씨.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느라 새된 숨을 몰아쉬었다. 까슬해진 입안을 타고 구르는 발음이 혀 끝을 저몄다.

조금 아픈 것 같아, 그뿐이야.

말라붙은 이름 일곱 자가 성긴 마음에 녹진히 스몄다.


잘 빚어진 얼굴을 틀어 다짜고짜 입을 맞대고, 그에 화를 내면 너털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능청이 좋았다. 가끔은 너무 안연해서 되레 소리를 친 저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렇지만 그 부끄럽다는 감정 마저도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느껴버릴 만큼. 츠키시마 케이는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마츠카와 잇세이에게 머리 끝까지 잠겨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당신을 볼걸.
유려히 찢어진 시선의 끝이 저였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둔함이 원망스러웠다. 이토록 제 안에 서릴 줄을 몰랐던 열일곱의 시작부터가 잘못이었을지도. 이제와 후회한들 이미 지나친 서제임에도, 츠키시마는 가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혹시 이랬더라면,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미련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는 말이 이보다 들어맞을 수도 없었다.

혹한 추위가 이어지는 겨울날에도 들끓는 애정이 더 너르던 지난 한 계절을 되짚어나갔다. 점철된 기억의 끄트머리에 다달아서는 별안간 왈칵, 눈물이 찼다.
머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흑백으로 죽어버린 시야에 익숙한 이의 잔상이 비쳤다.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좋아해요. 내가, 아직 당신을 좋아해.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폐부를 비집고 나부껴 오르는 향에 역정이 났다. 다 드러내고도 아직 한가득 남은 연정이 북받쳐 올랐다. 차라리 상사병이었다면 나았을 것을. 기실 츠키시마에게 깊다랗게 자리잡은 그것은 츠키시마가 마츠카와를 눈에 담는 것 조차도 허락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갈 곳 없는 원망을 끝없이 되내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 감았다. 새까만 시야에 곧이 박힌 잔상이 지독히도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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