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츠키








소재멘트 :: 뒷모습


아카아시 케이지 X 츠키시마 케이





  투둑, 투두둑. 등굣길부터 시작된 비는 점점 몸집을 키워서 하굣길에 다다라서는 맞으면 살을 에릴 듯이 쏟아져내렸다. 츠키시마는 빈 손을 내려다보다 우산도 없이 길바닥에 몸을 던졌다. 빗방울이 닿은 곳마다 욱신거림이 퍼지는게 집에 도착할 즈음엔 멍이라도 들 것 같았다. 비에 젖어 뿌얘진 시야에 앞서 걸어가는 하얀 운동화가 들어왔다.


  우산 없는거 알면 좀 씌워주지.


  진흙을 잔뜩 덮어쓴 운동화의 밑창이 퍽 낯익었다. 수십, 수백번을 내려다본 당신의 운동화. 끝이 조금 뻗친 짧은 머리칼부터 선이 고운 허리까지, 당신의 등에 걸린 마른 근육을 말하라면 감히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당신의 뒷모습. 매정하게 돌아선 서늘한 어깻죽지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뒤따라 걷는 제 존재를 알면서도 모른 척 시선 한 점 주지 않는 뒷통수가 얄미웠다. 여지껏 잘만 봐놓고, 당신은 꼭 이럴 때에만 야박하더라. 토해내지 못한 열화가 진득히 목구멍에 늘어붙었다.


  알고 있으면서. 다 보고 있었으면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땅을 두들겨대는 비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나를, 내 뒷모습을, 그렇게 보고 있었잖아. 모를 줄 알았어요? 오늘만이 아니었지. 한껏 도취된 눈으로, 내가 당신을 봐온 시간 동안 당신도 날 봐왔잖아. 어딜가나 검질기게 따라붙던 시선. 비쩍 골은 어깻죽지가 시릴 만큼 지켜봐온 주제에 왜 모른 척을 해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나는 그리 착하지 않아요. 뒤늦게 고개를 돌려도 당신이 나를 내버려둔 시간 만큼 괴롭힐테니까. 나를 빗속에 버려두고 걸어간 이 길을 절대 잊지 않고 계속해서 들쑤실 거에요.


  다 알면서도 모른 척, 그저 못 본 척 넘기면 정말 지나갈 줄 알았을까. 부단히도 피하려 갖은 애를 쓰던 날들, 그러고도 기어이 나를 보던 형형한 눈. 바보. 그래도 내가 좋지. 외면 할 수록 더 깊게 내려앉는 이름 자를 몇 번이고 덧그리고 억눌렀을 당신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다. 말해봐요. 당신이 남긴 상흔으로 가득할 내 뒷모습을 보고 얼마나 이를 물었는지. 당신이 나를 채웠듯, 내 존재도 당신을 채우고 있는지.


  당신의 시선이 머문 자리마다 더운 열꽃이 피었다. 나는 수십, 수백번이고 그 눈빛에 난도당했다. 당신만이 알고 있을 선명한 열상. 잘 찢어진 시선 속 홧홧한 열화가 닿아 생긴 생채기가 번졌다. 얼룩져서 깊다랗게 내려 앉았다. 아아, 이제 조금 아픈데. 퍼붓는 낙수에 몸도 마음도 진탕 젖어서, 어지러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따금씩 나오던 토스 미스. 철처하던 당신의 얼굴이 무너지고 비껴나간 공을 사이에 둔 채 돌아가는 시선의 끝은 늘 제 쪽을 향했다. 알아차린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워서, 부러 눈을 피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돌아가는 시선이 언짢아서 더 당신을 몰아세웠다. 나를 좀 보라고, 집요히 당신을 좇고 또 물고 늘어졌다. 그랬는데. 그럴수록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태도가 오기를 건들였다. 기어이 빗길을 뚫고 당신을 쫓아갈 만큼. 그래, 내가 졌어요. 당신이 이겼어.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봐 줘요.


  악 다문 이 사이로 앓는 소리가 났다. 성긴 마음에 얽어진 시간이 속을 긁었다. 감정이 먹먹히 차들었다. 페부에 물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비를 타고 어지럽게 돌던 열화가 머리 끝까지 번지고, 돌연 시야가 죽었다. 찰박. 물소리가 요란했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바지가 찝찝하게 감겨들었다. 황급히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메는데, 문득 고개를 드니 하이얀 손이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가자, 데려다줄게.”


  회녹빛 눈동자에 가득 담긴 얼굴이 낯설었다. 나른하게 찢어진 눈매가, 잘 빚어진 콧잔등이, 엷은 입술이 생소해서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건네진 손 끝에도 열이 번졌다.


  “…늦었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고.”


  아카아시 케이지. 당신이 나를 끌어올려. 긴긴 시간을 돌아 이제서야 마주본 당신의 얼굴이 웃었다. 지나온 길바닥에 늘어진 물길이 멎었다. 시야를 채우던 당신의 뒷모습이 잘게 허물어져 내리고, 환한 얼굴이 그 위로 덧그려졌다.



 사각 사각, 종이 위로 연필이 스치는 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여 가수의 노랫소리. 쌀은 움직이던 연필을 멈추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쿠와 눈이 마주친다. 쿠는 당황한 듯 눈을 끔뻑이다 베시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어, 선배...”


 선배 그림 그리는 거요. 쿠는 당연한 대꾸를 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볼 거 있다고. 쌀은 조금 낯이 뜨거워져 연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 더 안 그려요? 쿠가 물었다. 쌀은 대꾸 없이 커피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자 가슴이 한 결 차분해진다. 빨대를 잡고 휘휘 돌리자 얼음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네가 그렇게 보니까 그리기 싫어졌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흑, 하는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이제 안 볼게요! 딴 거 하고 있을 테니까.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물방울이 맺힌 컵을 양 손으로 움켜쥔다. 쪼로록, 달달한 카페모카를 들이켰다. 그리곤 잔뜩 쌓인 휘핑크림도 빨대 끝으로 듬뿍 떠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떨어진다. 입술에 크림 묻었어. 담백한 어조에도 쿠의 얼굴은 금세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혀를 내밀어 입술 전체를 핥아냈다. 달았다. 쌀은 그녀의 발그스름한 뺨을 흘끗 쳐다보고는 연필을 다시 잡았다. 유리 벽면 너머에서 새하얀 햇살이 스며들었다. 쿠의 옆모습을 그렸던 연습장 위로 햇볕 그림자가 드리운다.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새 종이에 연필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는 쿠를 본다. 딴청을 부리는 척 하더니, 이제는 진짜 다른 생각에 빠진 그녀를 본다. 휴대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슥, 스윽, 터치를 하는 하얀 손가락을 본다. 반소매 밑으로 드러나는 기다란 팔. 팔꿈치에서 안쪽으로 꺾여들고, 쭉 하니 뻗어가다 손목에서 또 한 번 꺾이는 아름다운 뼈대. 길게 깎인 연필로 그녀의 선을 따라 그어나간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너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쌀은 과거를 상기한다. 너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그 처음의 날. 햇살과 노래와 네가 하나로 어우러지던 날의 기억.



 그 날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알람이 울리고, 살포시 뜬 눈 새로 햇살이 스며들고, 푹신한 이불과 포근한 냄새가 몸을 감싸 안는 그런. 그래서 더 깨어나기 어려웠던 아침.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 날이 지금처럼 찬란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눈물이 왈칵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쌀은 간질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사랑. 그 애틋한 단어. 따듯한 감정. 그 시작. 시작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낯설고도 떨리는 감각. 갖가지 것들이 뒤섞여 온 몸을 가득 채워온다. 쌀은 순간을 붙잡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새하얀 캔버스 위에 생생히 피어나는 기억의 색깔들. 그것을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움직인다. 길마저도 오색찬란. 쌀은 맨 발바닥에 닿는 포근한 기억의 감촉을 더듬어간다. 보드라워. 잔뜩 쌓인 벚꽃 위를 걷는 기분에 절로 웃음이 피었다.  


 그랬다. 때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 되는 봄. 캠퍼스를 가득 메운 연분홍 꽃잎들과 따사로운 햇살. 쌀은 쏟아지는 벚꽃 눈을 맞으며 캠퍼스를 오가고 있었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화사하게 빛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는 냉락한 얼굴. 쌀은 참으로 다정한 색감에서 저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온 몸으로 봄을 맞이할 때면, 붓을 잡은 손끝만은 가늘게 떨려 와서. 깨끗한 도화지 위에 분홍, 노랑, 소라, 그런 파스텔 톤의 색깔들을 잔뜩 칠하고 싶은 욕구가 피어난다. 그녀의 담담한 낯짝보다는, 해사해진 캔버스가 쌀의 봄을 한껏 만끽 하는 것이었다.    


 타박 타박.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예술 대 건물 안은 바깥의 날씨와는 관계없이 온 종일 서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쌀은 벗어 두었던 카디건에 팔을 끼워 넣었다. 다음 수업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았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었다. 화실에 가서 어제 그리던 그림이나 마저 그릴까. 어쨌거나 완성을 하고 싶다는 마음과 한번 손을 뗀 그림에 붓질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충돌한다. 


 노랫소리가 흐른다. 쌀의 고개가 슬쩍 돌아간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을까. 신경조차 쓰지 않고 화실로 향했을까. 뭐랄까.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 그렇게 지나치고 싶지 않았어. 발길을 향하도록 하는 기이한 끌림. 나도 봄을 탄 걸까. 혼란스러움과, 그에 맞먹는 이유 모를 호기심이 그녀를 노래의 시작점으로 끌고 갔다. 복도의 끝. 닫히지 않은 문이 그녀를 반긴다. 무용과. 그래. 무용과의 연습실이 있었다. 


 쌀은 발을 멈추었다. 아니, 심장이 잠깐 동안 멈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의 눈알 속으로 열린 문 너머의 세상이 알알이 들어찬다. 노오란 머리칼의 여자. 검은 민소매 티에 타이트한 검은 바지. 아름다운 몸의 곡선. 뻗어나가는 기다란 팔과 아. 섬세한 손끝. 그 새하얀 손가락 끝에 세상의 모든 빛이 모여 드는 것 같은 착각. 쌀은 탄성이 터지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리를 내면 모든 것이 부서질 지도 몰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가방을 움켜쥔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음의 파도에 몸을 맡긴 여자가 아름다웠을 따름이다. 참으로 순수하게,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뻗어나가는 팔은 태양을 받치고, 튕겨져 올라가는 다리는 달을 향해 나아간다. 턱에서부터 목으로, 어깨로 나려가는 곡선. 부드럽게 움직이는 날갯죽지. 쌀은 여자의 춤사위 앞에서 저를 구성하는 세상이 바뀌려 하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의 거대한 찬란함을, 쌀은 가냘픈 맨 몸으로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인간의 내부에는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가, 거대한 문이 존재한다. 그 문은 오롯한 타인에게 활짝 열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인간은 울타리 너머에 선 채로 서로를 공유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다지도 견고한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라 속삭이는 때가 있었다. 그 찰나를 잡아낸다면 인간은 좀 더 쉽게 서로를 의식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열린 건 연습실의 문이 아니라 나의 문이었나. 쌀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냥 예쁘장하게 생긴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웃는 얼굴이 예쁘고, 술기운에 절인 뺨이 예쁘고, 유리잔을 움켜쥔 손이 예쁘고. 그녀의 겉껍데기는 확실히 쌀의 취향이었다. 길고 가늘게 뻗어나가는 여자. 언제였더라. 봄 햇살 아래에서 스친 그녀를 기억한다. 봄볕을 쬐는 꽃나무 같아서, 쌀은 조금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하지만 너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었구나. 이 압도적인 것, 이것에 무어라 이름을 붙어야 할까. 아름다움, 우아함, 강렬함, 섬세함. 수많은 것들이 한데 뒤엉키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모두 버렸다. 대지위에 굳건하게 뿌리내려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이내 창공으로 날아올라 날개를 펄럭인다. 네 손이 붙잡는 건,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햇살 줄기일까. 네 눈이 보고 있는 건, 내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별 조각일까.    


 가슴이 일렁거린다. 갈비뼈 아래의 어딘가, 그러니까, 심장인지 늑막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출렁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네가 뛰어 오를 때 마다 가슴 한 구석이 뻑적지근해진다. 네가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이자 드러나는 뒷목에 입술이 절로 달싹거렸다. 네 이름, 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쿠. 쿠. 무의식중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닐까. 쌀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좀 더 오랫동안 보고 싶어. 좀 더 그 자리에서 춤 춰줘. 


 한 부분을 집중해서 볼 때와 큰 그림을 볼 때의 느낌은 천지 차이다. 어느 한 쪽이 좋고 어느 한쪽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춤사위에 집중 할 때는 그녀의 발 닿는 곳 마다 물결이 밀려든다고 생각했다. 한 두 걸음 물러나, 그녀와, 그녀의 주변을 함께 볼 때는……. 경이로움. 눈이 시릴 만큼의 아름다움.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워져 눈꺼풀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손을 뻗어오고 그것을 조심스레 맞잡는 그녀의 손길. 뒤로 젖혀지는 상체 위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전등의 불빛. 전면 거울에는 그녀와 똑같은 모습의 여자가 춤을 춘다. 꽃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하고, 풀잎을 스치는 바람이, 모래알을 움켜잡는 파도가, 그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되는, 아름다움. 


 문득 눈알이 뻐근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지 않으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쌀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을 감지 않은 채로 그녀의 춤을, 그녀의 몸이 만들어 내는 선율을 응시했다. 


 아, 지금.


 지금, 그림을 그려야 했다.


 쌀은 발을 돌렸다. 화실로 가야해. 지금 이 느낌, 이 감각. 온 몸에 남아있는 그녀의 잔상을 종이 위에 토해내야 했다. 뛰다 시피 발을 놀린 쌀은 화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텅 비어 있었다. 어차피 누가 있고, 없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쌀은 제 자리로 가 이젤 앞에 섰다. 텅 빈 종이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았다. 그저 무(無)의 세상. 형태도, 색깔도, 의미도 없이, 존재하지 못한 채 버려진 세상. 쌀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머릿속을 스치는 선과, 색과, 빛과, 어둠. 그 모든 것들을 그려 넣자. 숨결을 불어 넣고, 생명을 쥐어 주자. 경이로울 만큼의 아름다움을, 그 감동을 이곳에. 아무도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백지에 새겨 넣자. 


 연필을 들었다. 가끔, 이런 순간이 있었다. 뇌가 명령을 내리고 그게 수많은 신경을 타고 내려와 손을 움직이는 과정이 아닌, 오로지 손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순간. 캔버스 위에는 생각지도 못한 선이 그어지고, 그 선들이 모여 상상하지 못한 형태가 잡히고, 마지막 선을 그은 후 연필을 떼어 내면 가슴 벅찬 또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쌀은 이 날을 하나의 분기점이라 여겼다. 흥미 있는 것들도, 그리고 싶은 것들도 없이 흘러가던 무기력한 봄날. 이제 그 봄은 따스하고, 달콤하고, 가슴으로 들어차서, 아, 아아. 스치듯 지나갔던 봄꽃들이 눈동자에 쏙쏙 들이 틀어 박혔다. 나뭇잎 사이로 빠져나오는 빛줄기들이 아름다웠다. 코끝을 스치는 벚꽃냄새. 네가 이곳에 서 있으면 노오란 꽃처럼 보일까. 툭 하니 꺾어서 화병에 꽂아둘까. 봄비를 머금어 완전히 개화하기를 기다릴까. 이유모를 기대감이, 덧없는 고뇌가 쌀의 손끝으로 뻗어나간다.


 나. 네가 궁금해.


 쿠는 때때로 무용과 연습실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따금씩 쌀은 다른 여자애들 사이에서 웃으며 떠들고 있었고, 또 이따금씩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아주 운이 좋을 때는 그녀가 춤을 추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뛰어오르고 뻗어나가고 휘돌고…….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봐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저 선, 저 움직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언제고, 몇 번이고 보아도 그녀의 춤사위는 쌀의 뇌리에 틀어 박혔다. 매번 똑같이 심장을 뛰게 하면서, 매번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을 손끝에 실었다. 선명하게 남은 그녀의 잔상을 그려내는 선. 굵고 가늘게, 무겁고 가볍게, 빠르고 느리게. 양 극에 있는 것들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크로키. 무엇이든 남겨 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네 춤은, 네가 만드는 세계는 내게 그 정도의 의미야. 

 오지랖 넓은 동기가 물어올 때가 있었다. 누굴 보고 그리는 거야? 그때면 쌀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입술을 끌어올려 희미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그 애는 나의 뮤즈야. 


 예술가에게 꼭 한 명쯤은 존재한다는 뮤즈. 영감을 불러일으켜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는 절대적인 존재. 폴 베를렌이 아르튀르 랭보를 만났을 적 이런 감동에 축축이 젖어들었을까. 물 먹은 도화지 위로 빠르게 번지는 투명한 색감. 한번 스며들면 지워지지 않을 창작에의 열망.


 그때의 나는, 너와, 나의 뮤즈와, 이렇게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봄의 끝자락. 길거리에는 연분홍 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고, 짧아진 소매에 훤히 드러난 팔위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던 날. 그 날도 나는 창 밖에서 너를 보고 있었고, 너는 팔을 둥글게 만들어 뻗어나가다 나를 발견했지. 우리 두 사람의 눈은 하나의 선에서 연결 되었어. 네 눈은 조금 커다래졌다가 흔들렸다가. 이내 돌아가는 몸뚱이에 우리의 시선은 끊어졌어. 하지만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라는 걸 너도 느꼈을까. 눈을 감아도 말이야. 네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았어.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화실로 돌아갔고, 캔버스에는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지. 너의, 참으로 찬란하던 눈빛을 담아. 가득, 한 가득 담아. 


 “있잖아요, 선배.”

 “응.”


 휴대폰을 내려놓은 쿠는 쌀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뺨으로 흘러내린다. 쌀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 한 줌을 귀 뒤로 넘긴다. 예뻐요. 쿠는 그 세 글자를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단맛이 났다.


 있잖아요. 난 선배 그림을 볼 때면 가슴이 뻐근해져요. 눈알이 홧홧하니 달아오르고,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아요. 나는 선배의 그림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나 봐요. 어쩌면 그건 내가 추구하는, 내가 강렬히 바라는 무언가일 수도 있겠죠. 사실 말로는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그 언젠가, 선배의 그림이 걸려 있던 갤러리에서 처음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해요. 당신의 크로키 북에 내가 한 가득인 걸 발견했을 때, 그때는 감동 그 이상의 것이 내 몸 안쪽을 가득 채웠죠. 우리, 우리는 이어져 있는 거죠. 그쵸. 


 쌀이 고개를 들었다. 쿠는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사랑했다. 수많은 생각이 가라앉아있는 밤하늘에 저 한 사람이 동동 떠오르는 게 좋았다. 자신의 눈에는 숨기지 못한 정염들이 가득 할 터였다. 하지만 하나, 하나의 감정 조각들에 쌀이 박혀 있었다. 선배. 선배도 내 눈동자를 사랑해요? 쿠는 그렇게 묻는 대신 눈을 접어 웃었다. 


 “밥은 뭐 먹을래요?”

 “너 먹고 싶은 거.”

 “어제도 나 먹고 싶은 거 먹었잖아요. 오늘은 선배 좋아하는 거 먹을래.”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각자의 세상에서 우리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는다. 말이 아닌 또 다른 언어로, 또 다른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붙잡고, 깍지를 껴서, 완전히 하나가 돼서. 


 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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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월 옷 설정


 평소에는 굉장히 캐쥬얼하게 입고 다님.

 좋아하는(혹은 자주 입는) 스타일은 검정색/흰색 딱 붙는 크롭탑에 청바지나 가끔씩은 와이셔츠 한 장에 레깅스도 입고 오고. 대회 앞두고는 레오타드에 타이즈 위로 반팔 롱티만 걸치고 다니기도 한다.(교내, 바쁠 때)


 시험기간이 아니거나 교내와 교외를 옮겨 다닐 때에는 주로 선이 예쁘게 떨어지는 옷을 좋아함. 그.. 허리가 조이고 골반 부분이 조금 부풀게 잡힌? 카키색/검정색 정장 바지 같은 것도 자주 입고, 여름에는 민소매 원피스도 과감하게 입는 편(파스텔톤 말고 좀 헤어스타일에 어울리는?). 등이 길게 파인 옷도 편하고 시원해서 제법 입고. 등 선 예뻤으면 좋겠다, 등허리 폭 패인 라인 잘 드러났으면. 가을 쯤엔 브이넥의 자몽색이나 와인색 7부 니트 같은 것도 좋아하고. 뼈가 도드라지는 전공이다보니 쇄골 라인도 예쁘게 도드라졌으면.(바쁘지 않은 교내,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나가는 교외)


 약속이 있거나 데이트를 가거나 기타등등 다른 때에는 유행에 제법 민감한 편. 최근에는 오프숄더에 꽂힘. 그 해의 트랜드에 맞춰가는 편.(교외)


 공적인 자리나 콩쿠르 시상식을 나갈 때에는 주로 붉은 색이나 흰/검의 허벅지를 반정도 가리는 원피스. 무용계이다 보니 의상들이 워낙 화려해서 흰색이나 약간 반짝거리는 퍼나 숄이 들어간 것도 종종 입을 것 같다. 사람 자체도 주목받는 편이고 헤어스타일이나 머리색도 결코 묻히는 편이 아닌데 옷도 원체 화려하게 입고(무용 몸매가 있으니 몸이 받쳐줘서 잘 소화했으면 ㅇqㅇ) 하다보니 공적인 자리에서는 제법 유명했으면 좋겠다. 코어 팬층보다는 대놓고 인기가 많다는 느낌.(공적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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